이창준 민속 칼럼니스트 

 

제사를 받드는 조상의 범위는 조선 초까지만 해도 신분에 따라 달리 하도록 규정하는 차등봉사(差等奉祀) 제도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 증조까지, 7품 이하는 2대 조부까지, 평민은 1대 부모에게만 제사를 받들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그러다가 조선중기부터 사림들을 중심으로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좇아 차츰 4대봉사(四代奉祀)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8세기 이후에는 서민층까지 부모·조부·증조부·고조부까지 제사를 받드는 4대봉사가 관례처럼 정착돼 버렸다.

원칙적으로 사당을 지어서 부모부터 고조까지 4대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게 했다. 가난해 사당을 지을 수 없는 경우에는 조상의 위패를 넣어 모셔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사용했다.

사당이 없는 일반 평민들은 지방(紙榜)으로 위패를 대신했다.

국가에 지대한 공을 세우거나 학문이 높아 백성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인물을 나라에서 선정해 영구히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불천위(不遷位)도 있다.

불천위는 나라에서 인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와 유림에서 정한 유림불천위(儒林不遷位), 문중에서 뜻을 모은 사불천위(私不遷位)가 있다. 유림불천위와 사불천위는 조선후기 그 수가 너무 많아져 폐단을 낳고 질서도 문란해졌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인 17세기 전반까지는 자손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냈다. 제사에서 아들과 딸(또는 사위), 친손과 외손의 구별이나 차별이 없었다. 재산상속은 균분상속이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제사의 주체는 장남(종손)과 맏며느리(종부)로 바뀌었고 상속 지분도 장남이 독점하게 된다. 

제사의 종류로는 네 계절의 중월(仲月: 음력 2·5·8·11월) 혹은 계월(季月: 음력 3·6·9·12월)에 받드는 시제(時祭), 조상이 사망한 날에 받드는 기제(忌祭), 봄가을 조상의 묘소에서 받드는 묘제(墓祭)가 있다. 

그 밖에도 음력 매달 초하루·보름·명절 및 조상의 생일 등에 모시는 제사를 차례(茶禮)라고 하며 또 명절에 모시는 제사는 절사(節祀)라고 한다.

절사는 정월 초하루·보름, 2월 한식, 3월 삼짇날, 5월 단오, 6월 유두, 8월 추석, 9월 중양, 11월 동지 등이 있다. 차례는 조선후기로 올수록 횟수가 줄었으나 정월 초하루와 8월 추석 차례는 어디서나 공통적이다. 차례에서 모시는 조상의 범위도 4대까지다.

이같이 4대봉사는 고조를 함께 하는 8촌까지 친족이라 하여 강한 유대감을 유지했고 초상이 났을 때 8촌까지 함께 상복을 입었다.

허례허식을 줄이기 위하여 1973년에 제정한 ‘가정의례준칙’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범위를 부모와 조부까지 2대로 한정하고, 제사의 종류도 기제와 정월 초하루와 추석에 모시는 차례로 제한했다. 

최근에는 3대봉사, 2대봉사 등 봉사의 대수를 줄이거나 조상의 제사를 한꺼번에 지내는 합사까지 등장했으나 웬만한 집안에서는 4대봉사를 고집하고 있다.

머지않아 우리나라 제사 풍속은 1대봉사, 즉 부모에게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가족해체, 결혼관의 변화, 종교적 소신 등으로 제사를 지내는 집안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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