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유리정원’ 스틸. (제공: 리틀빅픽처스)

숲에서 태어나 자란 재연
과학도로서 세상에 배신당하고
꿈·이상 선택해 스스로 고립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순수(純粹)’의 사전적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다’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다’ 등이다.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들어가면 순수의 의미가 깨진다. 즉 순수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영화 ‘유리정원(감독 신수원)’은 그 누구보다 순수했던 한 소녀를 이야기한다.

나무처럼 푸르던 ‘재연(문근영 분)’은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는 과학도다. 애정을 다해 열심히 연구한 아이템에 대해 ‘현실성 없다’고 핀잔을 듣게 된 재연은 후배에게 아이템과 사랑하는 사람을 강탈당한다. 이에 좌절한 재연은 벌목꾼이던 아버지가 남긴 숲속의 유리정원으로 도망가 엽록체 연구를 계속한다.

히트작 하나 없는 작가 ‘지훈(김태훈 분)’은 여느 무명작가와 마찬가지로 인기 소설을 쓰기 위해 발버둥 친다. 지훈은 작가 계의 거목과 회식하던 중 “재능 없으면 가서 술집이나 하라”는 말을 듣고 분노해 거목에게 “표절하지 말라”며 멱살을 잡는다. 이 일은 기사화되고 버텨주던 출판사마저 지훈의 손을 내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거하던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집을 나오게 된다.

재연이 살던 옥탑방으로 이사한 지훈은 재연이 남긴 그림과 메모를 보며 흥미를 갖는다. 이윽고 유리정원으로 찾아간 지훈은 재연을 몰래 관찰하며, 초록의 피가 흐르는 여인에 대한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글은 큰 인기를 끌어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배우 문근영의 복귀작 영화 ‘유리정원’은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전 세계 영화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 영화 ‘유리정원’ 스틸. (제공: 리틀빅픽처스)

영화 ‘명왕성’ ‘마돈나’ 등에서 강렬하고 독보적인 색깔로 칸국제영화제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트로피를 거머쥔 신수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기 때문이다. 신 감독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 삶이 파괴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인간,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영화”라며 “꿈과 이상이 현실에 의해 좌절된 주인공들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이 힐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신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현실에 좌절한 주인공들이 꿈과 이상을 좇는 과정을 그린다. 재연은 자신의 꿈을 위해 도를 넘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죠.”

포스터에도 쓰인 이 대사 한마디가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한다. 순수한 한 사람이 오염돼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게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자신이 숲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재연에게서 일상 속에서 잊고 있던 순수함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인간이 나무가 된다는 기이한 소재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다.

또 감각적인 미장센이 인상적이다. 자신이 숲에서 태어났다는 재연이 숲으로 되돌아가면서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난다. 마치 숲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현실이 아닌 듯한 숲속 유리정원은 드라마를 판타지로 보이게 만든다. 이 때문에 숲과 유리정원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여야 했다. 제작진은 전국을 돌아 경상남도 창녕의 우포늪 부근에서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미지의 숲을 발견해 스크린에 담았다.

도시는 어둡고 칙칙한 무채색 계열로, 숲은 싱그럽고 생명력 넘치는 초록색 계열로 꾸며졌다. 냉정한 현실과 이상적인 꿈의 대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원톱 주인공 재연 역을 맡은 문근영은 영화에서 데뷔 18년 차의 내공을 보여준다. 문근영은 자신이 가진 장애로 인해 세상을 경계하는 재연의 무미건조하지만 아련한 표정 연기를 선보인다. 물론 주 배경인 숲의 몽환적인 이미지와 문근영의 비주얼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답다.

재연의 숲에 몰래 들어온 지훈 역을 맡은 김태훈의 연기도 나쁘지 않다. 지훈은 재연의 비밀스러운 삶을 훔쳐보며 점점 재연에게 감정 이입하면서도 현실을 보고 흔들리는 두가지 마음을 갖고 있다. 김태훈은 순수한 얼굴이었다가 어느 순간 음흉한 눈빛으로 돌변하는 지훈을 막힘없이 연기한다. 특히 지훈의 소설을 내레이션처럼 읽어주는 부분이 김태훈의 목소리와 어울려 한층 더 영화에 몰입됐다.

▲ 영화 ‘유리정원’ 스틸. (제공: 리틀빅픽처스)

반면 문근영과 김태훈 외의 모든 조연의 연기가 아쉽다. 재연의 환상 속에서 충격적인 비주얼로 등장하는 ‘정교수’ 역의 서태화는 20년 이상의 연기 경력이 무색하게 연기력을 선보일 장면이 없다. 신예 박지수가 당차게 재연의 경쟁자인 후배 연구원 ‘수희’ 역을 맡았지만 책을 읽는 듯한 대사와 신음이 아쉬웠다.

이 작품은 관객을 배려하고 상업적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기에 ‘재밌다’ ‘즐겁다’라는 평은 드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근영의 파격적인 변신과 신비로운 분위기의 초록색 숲, 여운을 남기는 줄거리는 관객에게 큰 울림을 준다. 영화는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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