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술을 가리켜 근심을 잊는다는 뜻으로 망우물(忘憂物)이라고 한다. 망우물을 사랑한 시인들이 많았지만 그중 삼국지의 주인공 조조의 단행가(短行歌)가 단연 백미이다.

“술잔 들고 노래 부르세, 인생 얼마나 남았겠나(對酒當歌 人生幾何)/ 아침 이슬처럼 스러질 것이지만, 지난 세월 고생도 많았네(譬如朝露 去日苦多)/ 주먹 쥐고 울분 토해도, 지난 근심은 잊을 수 없어라(慨當以慷 憂思難忘)/ 아! 무엇으로 시름을 떨치리오, 오직 술뿐인 것을(何以解憂 唯有杜康)”

천하의 간웅(奸雄)으로 평가됐던 조조는 이런 감성을 지닌 풍류가였다. 유비의 편에서 쓴 소설 ‘삼국지연의’가 조조를 적벽대전의 패장으로 그리면서 이렇게 폄하한 것이다. 조조는 시인이었으며 당대의 경략가였다.

중국 진나라 시인 도연명도 ‘망우물’을 사랑했다. 그의 시에도 망우물은 수없이 등장하고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해 평생 전국을 돌아다닌 생육신 김시습은 ‘술 있으면 근심은 이내 깨어지고, 시 없으면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네’라고 노래하며 망우물을 평생 가까이 했다.

서울 중랑구에 망우물을 연상시키는 ‘망우산(忘憂山)’이 있다.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다. 일제 강점시기인 1933년부터 공동묘지가 되어 서울의 대표적인 장지로 알려져 왔다. 현재는 많이 이장돼 1만 7천여기의 묘지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 산이 왜 망우산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인가. 그 역사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망우고개는 자연경관과 형세가 빼어났다. 자신이 사후에 묻히게 될 묘지를 동구릉(구리시)으로 정한 태조 이성계가 망우고개에서 잠시 쉬었다. ‘이제는 모든 걱정을 잊겠구나’라고 한 말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예부터 풍수가들은 ‘한양만큼 경관이 빼어난 곳이 없으며 망우리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없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조선시대 망우리를 지극히 사랑한 재상은 백사 이항복이다. 백사는 영의정에서 물러나면서 망우리에 작은 초당을 마련했다. 그리고 한 때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고 살았다.

백사는 시간이 나면 나귀를 타고 청평을 구경 갔다. 그런데 영의정이었던 백사의 행색을 알아보는 이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냥 시골의 평범한 노인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백사는 농민들과 망우물을 나누면서 웃고 돌아오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백사가 한 때 별장으로 삼아 살던 곳은 망우리 지금 어디일까.

필자는 아차산 보루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망우동 산 정상에 길게 축조돼 있는 토루(土壘)를 발견했다. 이 토루는 아차산 용마산에서 별내로 가는 산 위에 길게 축조해 놓은 장성 형태였다. 이 토성이 혹 신라 향가인 ‘장한가(長恨歌)’가 태어난 장한성(長漢城) 줄기는 아닐까.

장한가는 백제 왕도였던 장한성에서 고구려 군사와 싸우다가 전사한 신라 전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부른 노래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사와 곡이 전해지지 않는다. 혹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내는 한으로 부른 아리랑의 원류는 아니었을까. 당시 전사들의 많은 시신들도 망우산 곳곳에 묻혀있다.

망우리를 사랑했던 백사는 지금 포천 선영에 영면해 있지만 이곳에는 한용운, 오세창, 서동일 등 독립 운동가들과 이중섭, 박인환 등 17인의 유명 예술인과 인사들이 잠들어 있다. 조선말 의사이자 한글학자였던 지석영 선생도 여기에 묻혔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소도 이장되기 전에는 망우리에 있었다. 근세 일제에 항거해 민족독립을 고취하고 예술혼을 심은 많은 영웅들이 영면하고 있는 것이다.

중랑구청은 망우리를 단장하고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베토벤과 유명 음악인들이 묻힌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의 중앙묘지처럼 가꾸겠다는 것이다. 고대 삼국 역사에 등장하는 ‘장한가’의 비밀도 함께 발굴해 그 역사성을 부각시킨다면 더 멋진 명소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