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재를 아는가. 각 지역마다 선조들의 삶이 지명과 문화재 등을 통해 잘 남아 있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덜 인지할 수 있다. 이에 각 지역에 남아있는 문화와 역사의 소중함을 알아보는 내 고향 역사탐방을 함께 떠나보려 한다.

▲ 강화 갑곶돈대 ⓒ천지일보(뉴스천지)
 

고려, 몽골군 침략 막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해 방어시설 쌓아
갑곶돈은 강화해협 지키던 요새
고종 때, 갑곶돈에 갑곶포대 설치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인천 강화군 강화대교를 건너면 제일 먼저 만나는 유적지가 ‘갑곶돈대’다. 강화대교 아래에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야트막한 성벽이 길게 이어진 갑곶돈대는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가득했다. 강화도를 찾아오는 이들도 꼭 찾는 명소다. 하지만 평화로움 이전, 이곳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특히 갑곶돈대는 외적을 방어하는 장소였다.

◆천혜의 요새 강화

중국으로의 진출과 선진문물의 주요 이동통로였던 강화는 삼국시대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던 곳이다. 3세기 전 강화는 백제의 영토였고,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편입돼 혈구군이 설치됐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통일신라에 편입됐는데 757년(경덕왕 16)에 해구군, 844년에 혈구진이 설치됐다.

강화가 임시 수도로 선택된 것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에, 초원지대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몽골의 접근이 어렵고 해로로 조세를 운송하기 편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몽골은 총 6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는데, 이는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고려가 남송과 동맹을 맺고 배후를 공격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강화로 천도했을 때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시설도 조성했다. 천도를 전후해 궁궐을 둘러싼 내성을, 1233년부터 1237년까지 강화도 동쪽 해안에 외성을 쌓았다. 또 1250년에는 도읍을 둘러싼 중성을 쌓았다.

강화성곽은 1259년 몽골과 화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몽골의 요구에 의해 모두 헐렸다. 이후 무뎌진 채 방치되다가 조선 중기 이후 강화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1618년(광해군10)부터 수많은 개축 과정이 이뤄졌다.
 

▲ 강화도 갑곶돈대에 재현된 포대 ⓒ천지일보(뉴스천지)

◆포대 설치한 갑곶돈

특히 갑곶돈은 고려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골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갑곶’이라는 이름은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 데서 전해오고 있고, 고려 때 몽골군이 이곳을 건너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됐다는 전설도 있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난 후 조선 정부는 강화도 방어책의 하나로 12진보(鎭堡)를 설치했다. 이후 진보와 진보 사이에도 여러 곳의 돈대를 쌓았는데, 그중 하나가 갑곶돈대다.

실제로 갑곶돈대가 완성된 건 1679년(숙종 5) 5월이다. 1875년(고종 12)에는 갑곶돈에 갑곶포대가 설치됐다.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이후 갑곶돈은 허물어져 일부만 남아 있었고, 1976년에 복원했다. 오늘날에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불랑기’,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 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춘 ‘소포’ , ‘대포’ 등이 복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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