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무슨 선거가 이런가. 6월 2일의 지방 선거는 정말 지방 선거가 맞는지 국회의원 선거인지 대통령 선거인지를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성실한 지방 일꾼을 뽑아야 할 선거였는데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에서 다루어져야 할 중앙정치의 거대 담론들만 난무했다.

중앙정치의 연장전, 대리전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는 민선(民選) 5기에 이른 우리 풀뿌리 민주주의가 중앙정치에 의해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으며 지방 선거의 참 뜻에서 크게 일탈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우리의 풀뿌리 민주주의가 직면하게 된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제도가 정당 공천에 의해 이루어지는 지방 선거이기 때문에 초래되는 이런 불가피한 폐단들을 어떻게 하면 바로 잡을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해볼 때가 된 것 같다.

야당은 정권심판론과 견제론을 들고 나왔다. 이에 여당은 안정론으로 맞섰다. 구호로 보면 지방 선거가 아니고 꼭 국회의원 선거다. 여야 지도부가 총동원 돼 이런 구호로 지방을 돌며 공천한 후보들을 총력 지원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여야 간에 주고받는 말이 험악해지고 선거 분위기는 혼탁해졌다. 정당이 공천한 후보들의 당락이 바로 공천을 준 정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고 지지도이며 ‘정당의 영토(領土)’ 넓이를 결정하기 때문에 사활을 건 선거 캠페인(Campaign)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지역 특성과 사정에 따라 지방자치의 활성화와 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같은 지방 선거의 본질에 맞는 쟁점을 놓고 치러져야 할 선거가 엉뚱하게 중앙 정치의 대결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역 이슈(Issue)는 중앙정치 바람에 휩쓸려서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지방 선거가 대권(大權) 선거에 비해서도 조금도 그 치열함이 덜하지 않는 야야의 큰 싸움판, 날카로운 정쟁(政爭)의 무대로 변질됐음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도대체 지역 일꾼들의 본업(本業)이 정권의 심판이나 안정과 무슨 상관이 있어 이러는 것인가. 왜 또 상관이 있어야 되는 것인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권자인 주민이나 국민의 입장에서는 정권의 심판이나 안정과는 ‘상관’도 없고 ‘상관’이 있을 필요도 없으며 ‘상관’이 없어야 옳다.

지역 일꾼들은 주민에게만 충실하면 된다. 이렇게 명백한 사실 관계를 거창한 구호로 오염시키는 것은 공천 후보들의 당선이 바로 지방에 대한 당 세력의 투사(投射) 내지 확장이 되는 파당적 이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파당적 이해를 위해 존재하는 지방 선거 후보의 정당 공천제도에 대해 회의를 가지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천안함 폭침(爆沈)이 일으킨 북풍(北風),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1주기가 몰고 온 노풍(盧風) 등 소위 ‘바람’이 선거판을 휩쓴 것도 지방 선거가 중앙정치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여야는 서로 북풍, 노풍을 선거에 이용한다고 비방전을 전개하면서도 바람을 최대한 선거에 활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었다. ‘바람의 선거’를 한 것은 여야가 피장파장이고 막상막하였다.

누가 조작해서가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들이 일으킨 바람, 하필 선거철에 때맞추어 불어온 그 바람. 바로 북풍과 노풍의 위세에 다른 쟁점들은 빛을 잃고 말았다. 그 바람으로 선거의 판세는 요동쳤다.

지방 선거는 오염되고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바람이 더 강했나. 북풍은 태풍이고 노풍은 강풍이었던가. 역풍은 없었던가. 운(運)이라는 변수는 작용하지 않았는가.

바람이 여야에 안겨준 득실에 관한 산법(算法)은 그리 간단할 수가 없다. 어쨌든 이런 바람의 선거는 냉정한 선택을 방해하므로 바람직하지가 않다.

선거판을 뜨겁게 달군 4대강 사업과 세종시 건설 문제도 중앙정치의 이슈다. 지방 선거에서 뽑힌 지역 일꾼들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이슈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찬반으로 엇갈린 국민 여론을 공천 후보자들의 득표를 위해 선동적(Sensational)으로 각 당이 이용했다. 우리의 지방자치단체는 중앙정부의 재정지원이 없으면 유지가 안 된다.

재정자립도가 형편없다. 취약한 재정을 해결하려면 중앙정부의 젖줄에 의존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다. 말이 지방 자치이지 중앙정부의 간섭을 안 받는 실질적인 권한도 별 것이 없다.

이런 문제들을 당선자를 많이 낸 단일 정당에서 해결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모를까 이렇게 제 앞가림도 못할 자치단체장을 뽑아야 하는 선거에 정권의 심판론 등의 거대 이슈를 들고 나오는 것은 참 우스운 얘기 아닌가. 왜 지방 선거가 이런 문제로 와글와글 소모적이어야 되는가.

흔히 말하듯 우리의 중앙정치는 패거리 정치다. 천안함 폭침과 같은 중대한 북한의 도발행동에도 패거리 의식으로 대립하는 여야가 초당적(超黨的)인 대북결의안 하나를 얼른 합의해 제때에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안보(安保)라는 것은 그 바탕위에 여야가 살고 국민이 사는 공통의 절대가치다. 그런 절대가치를 놓고도 이른바 좌니 우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패거리 의식의 좁은 울타리를 못 벗어나는 것이 우리 정치다. 이런 정치는 국론과 국민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원심력(遠心力)으로 작용한다.

그런 정치가 지방정치와 지방자치단체를 주무르면 국민과 국론분열을 더욱 자잘하게 지역적으로, 인구학적(Demographical)으로 세분화해놓아 버리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중앙당 공천 제도가 빚어내는 지방 선거의 일탈 이제는 손볼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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