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산성 ⓒ천지일보(뉴스천지)

아픔 담긴 장소지만 관광객 이어져
인조, 남한산성 남문 통해 산성 들어가
청나라 12만 대군 주둔한 곳 훤히 보여
수어장대, 옹성 등 군사적 시설도 남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치열했던 47일간의 역사를 담은 남한산성 이야기가 최근 영화로 제작됐다. 개봉 7일 만에 300만명을 돌파하는 등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다. 엄동설한인데다 식량부족까지 덮친 악조건. 싸워야 할지, 항복해야 할지 조선의 왕 인조는 선택해야 했다. 밤낮없이 고뇌로 씨름해야 했던 남한산성의 현장에서 그날의 숨결을 다시 한번 느껴봤다.

◆정묘호란에 이어진 병자호란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은 서울과 인접해 오늘날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 하나였다.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해 1624년(인조 2)에 축성했다. 390여년이 지났지만 웅장한 성의 모습이 잘 남아있어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 남한산성 남문 현재의 모습과 옛 모습(왼쪽)ⓒ천지일보(뉴스천지)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으로 피난한 인조가 47일간 항전한 곳이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세력이 커진 후금은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후 조선에는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이를 놓고 조선 조정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주화파는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훗날을 기약하자고 주장했고, 척화파는 청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세는 척화파로 흘렀고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한다. 이에 청나라가 12만 대군을 이끌고 1636년 조선으로 쳐들어오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뒤늦게 인조와 신하는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한다. 하지만 남한산성에는 50여일분의 식량과 1만 3천여명의 군사밖에 없었고, 인조는 청나라에 대항해 싸우다 결국 47일 만에 항복했다.

▲ 남한산성 행궁ⓒ천지일보(뉴스천지)

◆정상서 한눈에 보이는 송파구

남한산성은 아픔이 담긴 역사적 장소이지만, 오늘날 많은 이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과 근접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먼저 발길이 가는 곳은 남한산성 행궁이다. 이곳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됐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피해있던 곳이다. 이후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도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했다.

산성길에 오르면 제일 먼저 남문이 등장하는데, 남한산성 4개의 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이 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남문을 지나면 서암문이 등장한다. 이곳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다. 병자호란 당시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기도 해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송파구 일대ⓒ천지일보(뉴스천지)

남한산성 정상에 다다르면 송파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12만 대군이 주둔하던 곳이다. 청에 항복한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린다)’를 하게 되는 치욕을 겪었다. 그 역사를 알려주는 삼전도비는 송파구 석촌호수 부근에 세워져 있다.

◆수어장대와 청량당

남한산성 정상에는 수어장대가 있다. 장대는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이다. 수어장대는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장대로서 남한산성에 세워졌던 5개의 장대 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또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인조 2년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 남한산성수어장대의 옛 모습과 현재 ⓒ천지일보(뉴스천지)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해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쪽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수어장대 한쪽에는 사당인 ‘청량당’도 있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 남한산성 연주봉옹대ⓒ천지일보(뉴스천지)

이중의 성벽을 지닌 ‘연주봉옹성’도 있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곳에서는 하남시도 내려다보이는 등 풍경이 아름답다. 남한산성의 크기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저 멀리까지 보이는 남한산성. 주변 산세와 아름다운 굴곡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쳐진 성곽은 아름답다. 그러면서도 장엄함이 느껴졌다. 비록 병자호란의 아픔을 담고 있지만, 과연 한양 외곽을 지킨 4대 요새 중 하나로 불릴만했다. 

▲ 남한산성을 오르는 관광객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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