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준 민속 칼럼니스트 

 

고무신은 언제부터 신었을까? 고무신을 최초로 신은 사람은 누구일까? 고무신의 재료는 무엇일까? 고무신은 우리 전통 신발일까?

고무신을 최초로 신은 사람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다. 고무신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처음 등장했고 고무나무에서 얻은 생고무를 주원료로 만들었다.

고무는 11세기에 멕시코에서 공에 사용한 것이 시초이며 유럽에서는 1770년 프리스틀리(Priestley, J.)가 지우개로 처음 사용했다. 1839년 미국에서 신발 재료로 개발됐다. 일본에는 1858년 개항 이후 고무장화나 고무덧신이 수입됐다.

우리나라에는 이병두(李丙斗)가 일본에서 고무 배합 기술과 제조 공정을 배운 뒤 귀국했다.

고무신 공장은 1919년 이하영(李夏榮)이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처음 세웠고, 1921년 김성수(金性洙)가 중앙상공주식회사를, 김동원(金東元)은 정창고무공장을 평양에 설립했다.

이때부터 고무신공장이 난립해 현재와 같은 고무신을 대량으로 생산했고 경표(京表), 상표(上表), 별표, 대륙표(大陸表) 등이 대표적인 상표였다.

한민족은 고대시대부터 짚신·미투리·갖신·나막신을 사용했다. 고무신의 탄생은 신발의 혁명이나 마찬가지다. 

고무신은 방수가 잘 돼 실용적이었으며 가격도 미투리가 25전인 데 비해 40전이었으니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짚신과 갖신 모양은 남자 고무신에, 앞쪽이 코처럼 뾰족한 코신(당혜)의 디자인은 여자 고무신에 활용됐다.

고무신의 크기 단위는 문(文)으로 표시했고 1문은 약 2.4㎝다. 남자 고무신 10문 7(256.8㎝)이 가장 많이 팔렸다.

색상은 주로 하얀색과 검은색이 일반적이며 파란색과 보라색, 색동 고무신이 있다.

장점은 물을 먹지 않는 고무 재질이라 논농사를 짓는 시골에서 확실히 편리했다. 더러워지면 그냥 물로 쓱쓱 씻어버리면 깨끗해졌다. 

단점은 추위에 약하고 잘 벗겨진다는 점이다. 바닥이 얇기 때문에 돌멩이를 밟았을 때 발바닥이 아프고, 새신을 신었을 때 발뒤꿈치의 상처가 생겨 절뚝거리게 되는 것이다.

고무신 사용은 1945년 광복이후 6.25전쟁까지 전성기를 이루다가, 1960년대부터 운동화와 구두의 생활화로 그 선호도가 날로 떨어졌다.

현재는 시골의 노인, 사찰의 스님, 그리고 교도소의 재소자 등으로 수요가 줄어 버렸다. 

몇몇 농촌 지역의 축제나 민속놀이에서 ‘고무신 멀리 날리기 경기’를 통해 추억을 되살리는 정도다.

한 때 고무신은 막걸리와 함께 부정선거의 상징이 됐다. 과거 정치인들이 투표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뿌렸던 대표적인 상품이기 때문이다.

고무신과 관련한 속담으로는 “고무신도 제짝이 있다”는 말은 남녀 간의 짝이 어디엔가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군대 간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한 여성을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고 하는 데 ‘개가(改嫁)하다’란 뜻이다. 

반가운 사람을 맞으러 정신없이 허둥지둥 뛰어나가는 것을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간다”고 했다. 
중매장이가 혼인을 성사시키면 받는 대가를 ‘고무신 값’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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