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P씨는 유능한 30대 테크노크라트이다. 공학박사 학위 소지자로 IT쪽 기업에서 일하던 그는 최근 직장을 잃었다. 수년간 근무해온 국내 기업체를 떠나 올해 한국에서 창업한 중국 IT 업체로 이직한 그였다. 중국 업체가 파격적인 고액 연봉을 내걸고 경력사원을 모집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했다. 얼마동안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자부심을 느끼며 즐거이 출퇴근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달 그 중국 법인이 돌연 폐업 신고를 내고 중국으로 철수해버렸다. 한국을 떠난 이유가 정확하지 않았다. 법인을 세운 지 시간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 때문에 영업 실적 악화 같은 경영상 문제는 아니었다. 한반도 안보위기나 사드논란 때문에 떠난 것 같다는 게 직원들 분석이었다. 외국투자자들에게 한국은 불안한 모험의 땅이었다. 아무튼 졸지에 직장을 잃고 허탈해하며 고개 숙인 채 혼술만 마시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필자 지인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힘든 이가 어찌 P씨뿐이랴.

하늘을 보아도 땅을 보아도 아름답다. 한반도는 말 그대로 수려한 금수강산이다. 낙엽 떨어지는 저녁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을의 정취를 바라볼 수 있다면 이 계절이야말로 따뜻한 가슴 나누며 사랑하기 좋은 계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경제적 안정을 이루지 못한 이에겐 오히려 가을이 눈물나도록 서럽다. 추석명절 긴 연휴에 자영업자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돈 못 버는 연휴 동안에도 임대료와 인건비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소득주도성장론과 최저임금인상도 중소기업체에는 부담이다. 소비수요를 늘린다지만 해외여행만 늘어 내수 진작 효과가 별무신통이었던 듯하다. 북핵 위기에 발목이 잡힌 안보불안이 경제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피부로 체감되는 현실은 경기가 침체를 넘어 위기설까지 회자되는 수준이다. 북핵·미사일드라이브는 어디가 끝일까.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마당에 전쟁이라니 웬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서민들의 휘어진 허리가 펴지려면 밑도 끝도 없는 북한관련 지정학적 리스크부터 해소돼야 할 텐데. 북한과 미국의 위험한 ‘말폭탄’ 공방과 역대급 엽기인 전쟁위협이 볼썽사납기 짝이 없다. 외교·국방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안갯속 같은 ‘폭풍전 고요’인지 국회 국정감사에서라도 한번 제대로 따져봐야 하겠다.

살얼음판을 걷는 안보 국면 못지않게 사회 불안도 엽기적인 수준이다. 철원 총기 사고 병사의 희생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라도 기가 막히고 분통터진다. 사격훈련장에서 난데없이 날아온 총탄에 머리를 맞아 아까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원래는 운이 나빠 도비탄에 맞은 것이라는 발표로 군 당국이 깔아뭉개 덮어버리려 했었다니. 이러고도 국민에게 군 당국을, 정부를 믿어달라고 할 수 있을까. 또 ‘어금니아빠’라는 ‘살인의 추억’은 영화인가, 실화인가. 부인 자살부터 딸친구 죽음까지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미스테리의 연속물인데. 시청률에 목매는 자극적인 엽기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괴이한 행적이지, 정상적인 인간의 꼬락서니가 아니다.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라고 공표된 가수 김광석씨 죽음에 관한 의혹도 규명돼야 한다. 속단은 금물이고, 수사결과는 더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딸 사망사실을 10년 동안 알리지 않은 고인 아내의 행적은 일단 건전한 가족의 상식엔 한참 어긋나는 일이다.

망국적이다. 말세(末世)다. 미친 인간이 많다. 돈이면 최고라는 풍조와 흉내범죄가 만연하고, 이기주의 황금만능주의의 싹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시청자를 죽였다 살렸다 하는 엽기적인 TV드라마부터 공포스럽다. 국민적 영향력이 너무도 크지만 이미 궤도를 이탈하고 병들어 사회를 오염시키고 있는 저질 상업방송드라마를 제재·정화하지 못하는 것은 왜인가. 뜻있는 인사들이 나서라. 범국가적인 협의체를 구성하라. 억만금을 들여서라도 상업방송 탈선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방송이 시청률 무한경쟁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 돈과 국가권력, 이 거대한 두 마리 공룡으로부터 자유로운 공영방송체제가 갖춰져야 한국이라는 나라가 산다. 묵과하고 넘어가면 한국의 교육·문화·의식개혁은 공염불이다. TV방송보다 청소년 교육·문화·의식에 더 영향을 미치는 괴물이 또 존재하는가. 있다면 어디 말해보라.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 존엄성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일 터. 아름다운 가을 들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과연 우리가 복되고 신비로운 천혜의 가을을 즐길만한 자격 있는 이 땅의 주인들일까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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