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수성 촉석루 (사진제공: 진주시)

[천지일보=정인선 기자]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대첩의 영광과 슬픔의 역사가 고이 잠들어 있는 경남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사적 제118호 진주성. 그 안에는 진주성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과 일본군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이야기가 녹아있다.

# 가부키의 악역(?) 김시민 장군

성의 정문격인 공북문을 지나 진주성을 들어서면 호국충절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한 진주성 수호상인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김시민 장군은 1592년(선조 25) 10월 5일 2만 왜군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3800명의 병사로 맹렬한 공방전 끝에 진주성대첩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진주성대첩은 일본 역사책에 ‘임진란 때 진주에서만 대패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왜군이 참패했던 전투였다. 400년의 전통을 이어온 일본의 대표적 고전연극인 ‘가부키’에서도 김시민 장군을 일컫는 목사(牧使)라는 이름의 악역이 등장할 만큼 패배를 잊지 못해 억울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참패를 맛본 왜군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차 진주성대첩이 있은 지 8개월 뒤인 1593년 6월 3만 7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왜군의 공격에 맞서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의 3400 병사와 7만 명의 민초가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장렬히 싸웠지만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진주성이 함락됐다.

진주성에 가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호인 김시민 장군 전공비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민·관·군의 충의를 새긴 촉석정충단비가 세워져 있다.

두 개의 비를 지나면 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계사년(1593년)에 순국한 7만 민·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해 건립한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다.

진주성 담당 장일영(68) 문화해설사는 “7만이란 많은 수가 희생돼 무덤 대신 제단을 만들어 넋을 기리고 있다”며 “오늘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 순절하신 분들의 유해 위를 걷는 것을 인식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논개’

2차 진주성 전투 후 함락된 진주성 촉석루에서 일본군이 벌이는 잔치에 참석해 일본군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 진주성엔 논개가 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발을 디디고 의로운 죽음을 맞이한 ‘의암(義巖)’이 있다.

이 바위는 위험하다고 해서 ‘위암(危巖)’이라고 불렀는데, 논개가 순국한 뒤로 옳을 의자를 써 ‘의암’이라고 부르게 됐다. 의암 왼쪽 진주교 교각에는 황동으로 만든 논개의 쌍가락지 상징물도 설치해 논개의 의로움을 기리고 있다.

의암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의암사적비도 세워져 있다. 의암사적비에는 논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유몽인의 <어우야담>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의암에서 올라와 촉석루 앞마당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의기사가 나온다.

의기사는 우리나라에서 임금이 여성을 위해 사당을 짓도록 허락한 유일한 곳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의기사 현판 좌우에는 다산 정약용, 매천 황현, 기생 산홍이 논개를 예찬하며 쓴 글이 걸려있다.

산홍의 시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두 사당과 높은 다락 있네/부끄럽구나 일없는 세상에 태어나/피리 북노리로 방탕하게 노는구나’라고 적혀있다.

산홍은 진주에 온 을사오적의 한사람인 이지용이 천금을 내놓고 첩이 돼 달라고 하자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며 거절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제 2의 논개라고도 불린다.

지조 높은 기생 산홍의 이 이야기는 황현의 <매천야록>에 기록돼 있다. 산홍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세상에 알린 매천의 시가 산홍의 시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 시와 풍류와 낭만이 흐르는 ‘촉석루’

평양 부병루와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진주성 위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촉석루. 진주성을 휘감아 도는 남강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촉석루는 2층 형태로 사방에 벽이 없이 뚫려있어 청풍명월(淸風明月)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돼 있다.

난간 밑에도 구멍을 뚫어 바람이 드나드는 데 걸림이 되지 않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것을 풍혈(風穴)이라고 하는데 구름모양으로 돼 있어 선인들은 이곳에 올라오는 것이 구름 위에 올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이곳에 올라서면 시가 우러나고, 풍류가 절로 나오며 낭만이 흐른다. 촉석루의 서까래에는 이런 촉석루를 예찬한 문인들의 글이 많이 걸려있다.

장일영 해설사는 “이색, 정몽주, 이황, 정약용 등과 같은 문인들 가운데 촉석루에 올라와 시 한 수 남기지 않은 분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전했다.

촉석루는 옛날부터 말을 알아듣는 꽃들(기생)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고, 전시에는 전장을 지휘하는 지휘본부요 평상시에는 과거장으로도 사용해 남장대 또는 장원루라고도 불렸다.

촉석루는 6·25 전쟁 때 불타 소실된 것을 시민들이 힘을 모아 진주 고적보존회를 만들어 1960년에 복원한 것이다.

이외에도 진주성 안에는 임진왜란 전문 역사발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과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의 신위를 모신 창렬사,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호국사, 경남도청 정문이었던 영남포정사, 촉석정충단비, 북장대, 서장대 등의 많은 문화재를 등이 있다.

현재 진주성은 내성만 복원된 상태이고, 2014년까지 외성을 복원하기 위한 작업 중에 들어갔다.

문화재 탐방을 온 이수강(대구) 씨 가족은 “진주성은 타 지역보다 많은 볼거리와 역사성을 지니고 있고, 깨끗하게 잘 정돈돼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이어 “문화해설사와 함께해서 많은 도움이 됐지만 어린이를 위한 문화해설사도 상시 대기해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