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南崗) 김덕수

인류가 이 지구라는 생활환경에 적응해 오는 동안 다양한 종족들은 각기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 그리고 종교를 발전시켜 왔다. 그렇다면 종교(宗敎)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으뜸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곧 진리를 설하여 인류가 나아갈 명확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 용어로는 뭇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고해를 벗어나서 해탈·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불자(佛子)라면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뚜렷한 서원과 불퇴전의 용맹심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佛’자를 파자하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범부(凡夫)를 떠났다, 초월했다는 뜻인데 그럼 범부란 어떤 이를 지칭할까?

갖가지 번뇌나 바르지 못한 견해로 인해 갖가지 업을 행한 후에 갖가지 과보를 받아 여러 세계에 태어나는 존재라는 의미다.

곧 무명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아직 번뇌에 얽매인 채 생사윤회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즉 사제(四諦)의 도리-사성제(四聖諦)라고도 하는데 첫째 고제(苦諦): 괴로움의 진리, 둘째 도제(集諦):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 셋째 멸제(滅諦):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 넷째 도제(道諦): 괴로움을 여의는 방법의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지혜가 일천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범부들은 신심(身心)의 고뇌를 만나면 온갖 악행을 일으켜 몸이 아프거나 평등의 도리에 대한 무지로 분별심과 차별심을 일으켜 신·구·의 삼업(身·口·意 三業)으로 수많은 악업을 짓게 된다.

이러한 범부를 초탈하는 이가 바로 불자이며 이 범부의 견해와 지위를 떨쳐버리는 대도(大道)를 인류에게 확연하게 제시해 준 위대한 불자가 있었으니 그 분이 곧 고타마 싯달타인 것이다.

고타마 싯달타, 곧 석가세존께서 해탈·열반을 증득(證得)하는 법으로 제시한 가르침은 계율을 청정히 하는 증상계학(增上戒學)과 선정(禪定)을 열심히 닦는 증상심학(增上心學), 그리고 지혜를 열심히 닦는 증상혜학(增上慧學), 이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의 실천이다.

이 삼학의 수행체계는 근본불교, 대승불교, 선불교 등에 모두 공통되는 것이다. 계정혜 삼학의 실천법이며 중도의 실천법으로 제시한 방편이 곧 팔정도(八正道) 혹은 팔지정도(八支正道)다. 팔정도를 제대로 실천하면 범부는 모든 괴로움을 여의고 자유로워져 해탈·열반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부가 제대로 실행만 하면 누구나 해탈·열반의 길로 들어가는 수승한 방편인 팔정도는 무엇인가?

8가지 중 바른 견해(正見)는 혜(慧)에 해당하는 가르침이고,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는 계(戒)에 해당하는 가르침이며, 바른 노력(正精進)은 계정혜 삼학에 공통(共通)하며,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은 定에 해당하는 가르침이다.

필자는 앞으로 본 지면을 통하여 석가세존께서 해탈·열반을 증득하는 방편으로 제시한 이 팔정도 수행을 중심으로 우리 불교에 대한 제반 이해와 나아갈 바를 독자 여러분과 고뇌하며 모색코자 한다.

특히 불교용어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도록 하고 삿된 견해를 바로잡는 데 필자의 얕은 식견을 기꺼이 보탤까 하며 날카로운 질책을 앙망하는 바이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지 어언 1700여 년. 그 장구한 시간 속에 부침을 거듭하며 어엿하게 우리의 문화로 토착화된 지 오래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 속에 불교는 정치이념으로나, 백성들의 신앙 측면에 있어서나, 또는 사회사적인 측면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쳐 이젠 우리 민족의 당당한 유전자가 되었다.

이는 유교(혹 종교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가 국가나 인류의 통치이념으로서 도덕과 예절의 체험과 실천이라는 교화적 측면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유교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 불교의 현실은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겨레에 전파된 이래 심오한 철학적·사상적 무게중심이었던 불교가 지금은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시대정신을 외면함은 물론 천박한 현실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기복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잃고 자멸의 길로 질주하고 있으면서도 냉철한 자기반성이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선지식의 혜안과 올바른 수행의 실천으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실상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는 것이 이 시대 불자들의 사명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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