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오래전 농경사회에서 유래됐지만 여기서 사용된 월력은 음력이다. 5월 농부, 즉 양력 6월이 되면 농촌에서는 모내기가 시작되고 농사일로 바쁜 때라서 농부의 등에 땀이 마를 날이 없다는 뜻이다. 여름철 농번기에 비지땀을 흘리면서 농사를 짓다보면 어느덧 곡식이 잘 자라 수확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때가 음력 8월, 양력으로 치자면 9월(늦을 경우 10월 초·중순)경이다. 농사일이 거의 마무리된 때라 힘 덜 들이고 일을 할 수 있어 신선처럼 지낼 수 있다는 의미의 ‘8월 신선’은 여름 내내 땀 흘린 결과로 농촌에서 풍성한 가을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이니 추석명절 즐거움이 내재된 이야기라 하겠다.

농사를 잘 지은 덕분에 풍성한 오곡백과(五穀百果)로 가족과 이웃들이 나누어 먹고, 즐거운 놀이를 하면서 다음해 풍년농사를 기원했던 것이니 당연히 추석은 설날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민속세시였다. 전통 명절인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는바 호남지방에는 ‘올벼심리’라 하여 그 해 생산된 올벼를 조상에게 천신(薦新)하는 제를 올리며, 영남지방에서도 채 익지 않은 곡식을 벤 ‘풋바심’으로 가장 먼저 조상께 바치는 의식이 행해지기도 했다.

그러한 행사에 더해 추석을 전후해 떨어져 살던 일가친척이 서로 만나 하루를 지내는 ‘온보기’와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의 중로상봉(中路相逢)인 ‘반보기’도 있었다. 지금 같으면 시집간 딸이 시가에 들렀다 귀가하는 길에 친정집에 들러 하루 이틀 머물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다. 모녀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반나절 동안 회포를 풀었던 것이니 비록 온보기를 하진 못했어도 여성들에게 잠시간 친정나들이는 큰 기쁨이었다.

바야흐로 황금연휴가 시작됐다. 지난달 말일부터 오는 9일까지 장장 열흘간 쉬는 추석연휴를 맞이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일정의 계획을 짜놓고 귀성 또는 여가선용의 설렘과 기대로 채우기도 하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향과 친지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연휴기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각양각색의 분위기 속에서 연휴가 시작된 첫날부터 귀성객과 여행객들로 교통체증이 따르고 있다는 실시간 뉴스가 나오고, 벌써부터 공항이 해외 행락객으로 크게 붐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사상 최장의 연휴가 이어지다보니 조석으로 들려오던 뻔한 국내외 소식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주부들의 추석 스트레스나 취직준비생들의 애환이 주류를 이룬다. 아무래도 정치이야기보다는 서민들의 바닥 민심이나 시골 노인네 걱정은 경제 주름살이 펴져 손주손녀들이 취직이 되고, 결혼해 안정된 가정을 이뤘으면 하는 소망일 것이다. 추석 민심은 예나지금이나 변함없건만 현장에서 보고 들은 정치인들의 아전인수격 해석과 뒷북 민심 전하기는 엉뚱하기 일쑤였다.

올해 추석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 하나 있는데 해외여행이다. 이번 추석 연휴 기간 중 해외여행 가는 내국인이 작게는 100만명, 많게는 130만명이라 한다. 일찌감치 계획을 잘 세워 열흘간 황금연휴를 잘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많게 마련인데 여행객 인원이 명절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이다. 지난해 추석 연휴(9.13~18) 때는 46만 9천여명이, 그리고 올해 설 연휴(1.26~31) 기간에는 49만 9천여명이 해외여행을 다녀온데 비해 이번 연휴기간에는 두 배나 늘어났으니 여행객이나 국내 관광업체의 입장에서 보면 어쨌든 좋은 현상인 것이다.

그동안 국내 관광업체는 북한의 도발과 중국과의 한반도 사드(THAAD) 배치 갈등으로 매우 힘들었다. 한국관광공사가 밝힌 올해 1~7월 기준 방한 외래객은 전년 동기 대비 약 21% 감소했고, 여행수지 적자 폭은 사상 최대치였다. 자연히 손실이 큰 실정에서 올 추석에는 반짝 관광 경기가 있었다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렇지만 여행객 입장에서 볼 때에 수시로 외국을 드나들 만큼 부자들은 얼마 되지 않을 테고, 거의가 오랫동안 준비해서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해외여행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니 한가위에는 그들의 마음에도 풍요함이 찾아들리라.

해가 거듭될수록 추석명절의 진정한 의미가 쇠락하고 있다. 법정 공휴일날 가족친지들이 함께 모여 차례를 올리거나, 송편을 먹고 쉰다는 의례적 행사로 여길 뿐이고, 그 본질과 가족의 화목보다는 명절 후유증 이야기가 더 크게 회자되기도 한다. 즐거운 민속 명절, 한가위에 대해 조선 순조 때 김매순(金邁淳)은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 “가위란 명칭은 신라에서 비롯됐다. 이 달에는 만물이 다 성숙하고, 중추는 또한 가절이라 하므로 민간에서는 이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아무리 가난한 벽촌의 집안에서도 예에 따라 모두 쌀로 술을 빚고 닭을 잡아 찬도 만들며, 또 온갖 과일을 풍성하게 차려놓는다. 그래서 말하기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기만 바란다(加也勿 減夜勿 但願長似嘉俳日)’라고 한다.” 이렇게 쓰여있다. 그 말처럼 모두가 올 추석에는 가족과 더불어 화목하고 풍요로운 명절을 맞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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