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유교사회에서는 ‘노(老)’를 어떻게 정의했을까. 예기(禮記)를 보면 60세를 기(耆), 70세를 노(老), 80∼90세를 모(耄)라고 했다. 회갑(回甲)을 맞는 나이를 일반적으로 ‘노(老)’에 들어서는 단계로 생각한 것이다.

수명이 짧았던 옛날에는 60을 넘기는 것도 어려웠으므로 회갑을 축일로 삼았다. 인생 70을 ‘고래희(古來稀)’라 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는 뜻이다. ‘모’를 ‘모모(耄耄)’라고도 쓰며 이 때부터는 정신마저 혼미해진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기(耆)’ 나이의 중신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로소(耆老所)라는 관청을 만들었다. 영조와 고종은 나이 50이 되자마자 기로소에 들어가 노인행세를 했다. 십여년 나이를 뛰어넘어 노신(老臣)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지팡이를 하사하기도 했다. 노인우대를 왕이 몸소 실천한 것이다.

노인우대는 공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었다. 공자는 3천명의 제자들에게 효(孝)는 덕(德)의 근본(根本)이며 자신의 생활신조를 ‘노자안지(老者安之)’라고 했다. 즉 노인들을 편안하게 모시는 삶을 지향한 것이다.

조선 역대 왕은 공자정신인 ‘노자안지’를 받들었다. 세종은 조선이 ‘효국(孝國)’임을 선언하고 노인에 대한 예우를 매우 중시했다. 세종은 안질치료차 청주를 순행할 당시 진천에서 하루 묵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한 효자얘기를 듣는다.

노은에 사는 김덕숭이란 선비가 하늘이 낸 효자라는 보고를 들은 것이다. 세종은 효자를 특별히 불러 위로하고 주육(酒肉)과 백미를 하사했다. 그가 죽자 어명을 내려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증직하고 삼강행실도에 효행을 기록하게 한다.

추석이나 국경일을 맞으면 왕은 나이 많은 노인들을 궁중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두 번이나 호란(胡亂)을 겪은 인조(仁祖)는 궁중안의 내수사 창고가 비어 노인잔치를 베풀지 못하자 끝없이 한탄했다.

“노인을 공경하고 어진 이를 높이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옛날에 제왕이 혹은 친히 잔치에 임석해 위로하고, 혹은 관작을 하사하기도 하며, 비단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노인을 공경하고 높이는 뜻인 것이다. 이제 나는 덕이 없어서 병화와 기근이 없는 해가 거의 없으니, 기로(耆老)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하략)”

노인들에 대한 한국의 지원제도는 매년 개선되고 있다. 치매노인들의 치료비도 이젠 환자부담이 다음 달부터는 10%까지 내리겠다는 정부발표도 있다. 저소득 노인 수당도 내년부터 인상된다.

그런데 요즈음 65세는 노인 축에도 들지 못한다. 시골 경로당을 가면 70세의 나이도 젊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 영양이 좋고 젊게 인생을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노인 나이를 70세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인가. 미국시인 사무엘 울만은 78세의 나이에 유명한 ‘청춘’이라는 시를 썼다. 울만은 30세라도 이상(理想)을 잃을 때 늙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은 이 시를 벽에 걸어 놓고 늘 애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활기찬 인생을 사는 노인들이 있는 반면, 가난과 질병에 고생하는 이들도 많다. 온기 없는 쪽방에서 돌보는 가족들도 없이 죽어가는 노인들도 있으며, 자식들의 짐이 되는 것을 걱정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부부들도 있다.

효국은 이제 가장 ‘불효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인가.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을 앞둔 ‘노인의 날’을 맞아 ‘노자안지’를 지켰던 모럴이 다시 회복되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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