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30년 전 태릉선수촌에서 일어난 사건이 생각났다. 역도 선수 이민우의 선수촌 무단이탈사건이다. 서울올림픽을 1년여 앞둔 1987년 3월, 역도 무제한급의 이민우가 당시 인기가 높았던 씨름으로 전향하기 위해 훈련 중이던 태릉선수촌에서 무단으로 이탈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전두환 독재정권과 대한체육회는 이민우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 제명처분을 내리고 씨름단 삼익가구 입단도 불허했다. 이 사건은 태릉선수촌 이탈이 군인의 탈영에 못지않은 사실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당시 모 스포츠신문 기자였던 필자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이민우가 서울올림픽에서 입상 전망이 불확실하고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돈을 벌 수 있는 씨름으로 가려 했다는 것을 개인 인터뷰를 통해 확인했다. 비록 합숙훈련 중인 태릉선수촌에서 무단으로 벗어난 것은 경솔한 판단이었지만 개인의 힘든 상황을 고려해 선처를 호소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보도했다. 기사 효과가 있었던 듯 이민우는 수개월 동안 자숙기간을 거친 뒤 고위층의 선처로 삼익가구에 입단, 씨름판에서 수년간 활약할 수 있었다. (그는 2006년 4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엘리트 스포츠의 요람 태릉선수촌이 영광의 반세기를 마감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지난 1966년 개촌한 태릉선수촌은 그동안 50여년간의 국가대표 훈련장으로서의 활동을 끝내고 27일 진천선수촌으로 바통을 넘겨준다. 

태릉선수촌은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국가가 총력체제로 지원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국가대표들만이 입촌해 훈련하는 태릉선수촌은 선수들을 위한 꿈과 희망의 무대이기도 했으며 눈물과 고통의 자리로 얼룩지기도 했다.

1965년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은 국가대표의 체계적인 관리 필요성을 절감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 문화재관리국 소유의 태릉 내에 선수촌을 열었다. 태릉선수촌은 한국스포츠가 크게 성장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가 해방 이후 첫 금메달을 획득하고, 1984년 LA올림픽에서부터 금메달을 다수 수확하며 10대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역할을 해냈다. 김연아 등 한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은 태릉선수촌에서 영광의 순간을 만들 수 있었다.

태릉선수촌의 성과는 세계 스포츠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옛 소련과 동독 등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한 이후 태릉선수촌은 정부의 막대한 예산지원 하에 엘리트 선수들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으로 철저히 관리해 탁월한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한국의 스포츠 역사는 짧은 편이지만 독일, 프랑스, 일본 등과 실력을 겨룰 정도로 급성장 할 수 있었던 데는 태릉선수촌의 역할이 큰 힘이 됐다. 태릉선수촌의 존재로 인해 국민들은 스포츠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한은 남북 스포츠 경쟁에서 열세를 보이자 태릉선수촌격인 평양 안골체육촌을 지난 1988년 개촌하기도 했으나 태릉선수촌에 비해 시설과 관리면에서 크게 뒤져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태릉선수촌은 긍정적인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민우 무단이탈사건에서 보았듯이 강압적인 시스템의 선수양성, 선수 인권 관리 등에서 역기능을 드러냈다. 태릉선수촌은 그동안 외신으로부터 강제적인 집체훈련으로 ‘병영 캠프’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일부 코칭스태프들이 훈련 중인 선수들을 폭행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태릉선수촌은 엘리트 스포츠의 공간으로만 활용해 생활체육을 하고 싶은 일반 국민들의 시설 이용을 제한하기도 했다.

태릉선수촌은 막을 내렸지만 한국스포츠의 상징적인 장소로서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는 데 각별히 신경을 썼으면 한다. 다행히도 대한체육회가 태릉선수촌을 역사적인 기념물로 문화재 등록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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