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938년 9월 12일자에 실린 사진으로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직후 평양신사에서 참배하는 모습.(출처: 한국기독교흑역사).

“죄악 자복하고 회개해야”
모퉁이돌선교회 자성의 목소리

일제 강점기 한국교회의 현실
개신교학교서 황국신민 양성
세금감면 혜택 받고 일제 찬양
성경·찬송가 ‘폐기·변개’까지도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해방과 함께 분단되어 아직까지도 피 흘리는 우리민족의 역사가 어느 때 보다 긴장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결과가 일제강점기 한국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신사참배의 죄악으로 인한 것은 아닐까요?”

유례없는 한반도 긴장 상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남-북이 분단돼 통일되지 못하는 게 한국교회가 역사 속에서 저지른 죄악 때문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신사참배가 자발적으로 이뤄진 점을 지적하며 회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북한과 중국 등 공산권 지역들을 대상으로 1983년 이후 꾸준히 선교활동을 해온 모퉁이돌선교회가 25일 진행된 기도회에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죄악을 회개합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선교회는 지난달 소식지인 ‘카타콤소식’에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민족에게 자행한 죄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용서하는 내용을 다뤘다고 밝히며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화두를 던졌다.

모퉁이돌선교회는 “일제의 탄압에 굴복해 한국교회가 자발적으로 신사참배를 결행한 죄악을 구체적으로 자복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선교회가 밝힌 신사참배 당시 한국교회의 모습은 참담했다.

◆개신교 학교·법인, 일제에 종속

설명에 따르면 1915년 일본이 장악한 조선총독부는 교육과 종교의 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개신교학교의 종교교육을 완전히 금지했다. 그러나 1919년 9월 제3대 조선 총독으로 지미파인 사이토(齊藤實)가 부임하면서 선교사 회유정책이 펼쳐졌다. 그 일환으로 개신교학교의 종교교육을 허가하면서 지정학교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를 통해 개신교학교가 식민지 교육체제로 귀속되기 시작했다. 경신학교, 계성학교, 신흥학교, 신성학교 등의 개신교학교들은 지정학교로 인가된 이후 일제가 요구하는 교과과정을 따르기 시작했다. 선교회는 그 결과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 시기에 개신교학교들은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그다음은 개신교단체의 법인 설립이었다. 1912년 식민지 조선에 부동산 등기제도를 실시한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에 개신교단체의 법인설립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선교회의 법인설립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미국 북장로교선교부, 미국 남장로교선교부, 미국 남감리교선교부, 미국 북감리교선교부, 캐나다 장로교선교부, 호주장로교선교부 등의 선교부가 이 시기에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로부터 30/1000의 비율이었던 세금이 1/1000의 비율로 감면되는 혜택이 제공됐다. 이에 선교사들은 조선총독부에 협조하는 태도로 전환했다. 한국감리교의 감독(1916~1928)을 지냈던 웰치 선교사는 사이토 총독을 ‘기독교(개신교) 정신의 구현자’라고 불렀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식민지 조선의 지도자들에게 “공연히 일본 통치를 공격만 하지 말고 스스로 고치고 타일러 민족을 위한 길을 찾아보시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선교회는 “재단법인의 설립으로 식민지 조선의 개신교는 기득권을 지킬 수 있게 됐는지 모르지만 조선총독부의 전면적인 통제를 받게 됐다”며 “그 결과는 ‘일본적 기독교(개신교)의 확립’,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로 나타났으며 그 열매가 ‘종교보국’이라는 미명 하에 시행된 신사참배와 전쟁협력이었다”고 평가했다.

▲ 1941년 7월 24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구약성경의 폐지를 보도한 신문 기사(출처: 한국기독교흑역사).

◆성경 일부 폐기하고 찬송가도 바꿔

당시 개신교는 일제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1944년 시행된 징병제를 정당화했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장을 맡았던 윤치호는 “조선 기독교인들이 중국에 파병돼 있는 일본군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위문대를 보내는 운동은 그 발상만으로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고 칭송했다. 해방 후에 연세대 총장을 역임한 백낙준 박사는 성경구절을 차용해 병역을 국민의 가장 숭고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또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에게 징병제에 적극 동참할 것을 강권했다.

한국개신교회는 일제 경찰의 압박이라며 성경 내용을 바꾸거나 폐기하기도 했다. 1940년 일제 경찰이 마련한 ‘기독교(개신교)에 대한 지도방침’에 따라 1942년 12월 감리교회는 가장 먼저 구약성서 폐기를 선언했다. 1943년 5월 5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유대사상을 없애기 위함이라며 적당한 해석교본을 편찬할 것을 결의했다. 1943년 10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도 설교시간에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을 사용하지 않고 4복음서만을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찬송가도 바뀌었다. 1940년 11월 10일 장로교 총회장 곽진근 목사는 장로회 총회 간부들과 함께 이른바 ‘조선예수교 장로회 혁신요강’을 발표했다. 이 혁신요강 제5조 3항에는 ‘찬미가 기타 모든 기독교(개신교) 관계 서적 출판물을 검토해 국체에 배반되는 자구를 개정할 것’이 명시됐다. 일제의 ‘천황-신민’이라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는 ‘왕, 대왕, 만백성, 백성, 임금, 구주, 구세주, 만유의 주재, 다스리시네’ 등 하나님의 통치권과 관련되는 단어는 ‘주, 주님-사람, 보살피시네’ 등으로 바꿨다.

◆“신사참배, 타의보다 자발로 봐야”

장로교는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12월 12일에는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와 부회장 김길창이 감리교 총리사 김종우와 전 총리사 양주삼, 성결교 이사장 이명직과 함께 일본의 이세신궁, 메이지신궁, 가시하라신궁, 아츠다신궁, 야스쿠니신사 등을 두루 참배하려고 일본으로 떠났다. 1939년 9월 10일 제28회 총회 결의에 의해 3천여 교회가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맹해 ‘종교보국’의 실적을 올렸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점은 총회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 이전부터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독자적으로 신사참배를 실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무려 장로교의 74%가 이미 신사참배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또한 신사참배를 총회 차원에서 결의하기 전부터 전승축하회 86회와 무운장구기도회 2042회를 실시하고 국방헌금 45만 4539원을 모금했다.

모퉁이돌선교회 연구원 부원장 송재선 목사는 “신사참배에 대한 일본의 외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 개신교 부흥역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던 한국교회가 개인 혹은 총회차원에서 자발적인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송 목사는 “한국교회의 죄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며 “해방 후에도 이 부끄러운 죄악에서 돌이키는 것은 고사하고 오랫동안 신사참배 한 죄악을 은폐하며 오늘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송 목사는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교회와 성도는 없다”며 “심지어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성도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이 죄악은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부분이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켜야만 하는 문제”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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