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교수

 

노 젓는 배가 물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에 탄 사람들이 노를 힘차게 저어야 한다. 노를 젓지 않는다면, 배는 물살에 밀려 떠내려 갈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다. 장밋빛 전망을 가지고 삶의 질을 제고하려면 현실인식을 통한 끊임없는 가속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구성원을 위한, 구성원 간의 포용적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위기 상황에 대비한 대응책 마련의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하겠다.

포용에 인색하거나 난색을 표명해서는 안 된다. 말로는 포용을 외치지만 현실은 확연히 다르다. 요즘 사제지간의 관계형성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왜 그런가. 포용과 비포용의 문제다. 스승과 제자와의 이상적인 관계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이뤄나가는 데 있다. 올해 6월 서울 연세대에서 발생한 한 대학원생의 폭발물 테러사건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테러 대상이 같은 과 교수였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 대학원생이 사제폭탄을 만들어 테러를 감행한 결과, 교수가 부상을 입었다. 사제지간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으니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뭔가 크게 잘못 바뀌었다. 어쨌든 개인적인 불만이 극단으로 치달아 발생한 사건이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려면 교육과 인권의 본질부터 파헤쳐야 한다. 문제의 발단은 교육의 구조적 모순, 소통의 부족, 상호 이해의 부족에 기인했다고 판단된다.

우리 사회는 평가제도가 보편화돼 있다. 누구나 좋은 평가를 받기를 원한다. 학교에서 학생은 교수로부터, 교수는 학생으로부터다. 그 대학원생은 교수가 융통성을 발휘해 무시험으로 해당 과목의 학점을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교수의 입장은 달랐을 것이다. 형평성을 적용하는 데 방점을 둬야 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시험을 봐야 학점을 줄 수 있다는 원칙을 주장했다고 추측된다. 물론 이런 추측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사건을 한낱 개인적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인 치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융통성 적용도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이뤄질 수 있다.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변인을 감안해야 한다면 무조건 적용할 수는 없다. 구조적 문제가 있다면 이를 해결해야 할 것이며, 그 중심에 포용의 원칙이 있어야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테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나 자유로운 곳은 없다. 이유가 어떻든 테러는 없어져야 하고 방지돼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환으로 공항 검색대에서 이뤄지는 검색처럼 모든 우편물에 대한 정교한 검색이 필요하다.

교수, 학생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닌, 공존공생의 관계로 인식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과거 하드 파워의 시대에서는 교수가 힘 있는 존재로 군림했다. 그러나 지금은 소프트 파워의 시대다. 말로만 외치는 포용이 아닌, 진정성 있는 포용과 상호 존중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포용의 생활화 및 이를 수반하는 프로그램을 짜야 한다.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에서 수석전문의로 근무하는 한국인 이승복 박사가 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것은 물론, 특수보조기구를 이용해서 글씨를 쓰는 중증장애인이다. 그가 희망을 갖고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부단한 노력 외에, 주변의 포용 및 교육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포용의 힘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주며 기적을 창출하기도 한다. 상호 포용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구축하는 것은 상생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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