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붕당’을 정의하면 학문이나 정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뜻한다. 그런데 조선 역사를 보면 붕당이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면서 생사를 다투는 투쟁 양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선조 때 정여립의 모반 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는 붕당(朋黨)이 본격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한 사건이다. 동~서 붕당 간 모함과 저주, 보복으로 그 후유증이 컸다.

이 사건에 연루돼 화를 당한 사류는 천여명이 넘었다. 이는 조선시대 4대 사화를 통해 피해를 입은 숫자보다 많은 숫자라고 한다. 화를 입은 사류 가운데는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이들도 상당수 있다.

기축옥사는 임진왜란 바로 직전에 발생했다. 당시 이 사건에만 목숨을 건 탓에 조정은 평소 국가 안보나 전란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그 때도 조선이 사대(事大)했던 명(明)나라를 너무 믿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광해군 때 호남선비 나덕윤은 상소를 올려, 임진왜란의 원인이 기축옥사에 있음을 지적한다. “기축의 변고는 뜻밖에 벌어졌는데, 간악한 자가 또 그 사이에 화를 빚어내 한 떼의 명류들이 모두 반역의 깊은 구렁에 빠졌고, 나라 안에 큰 싸움이 일어나 왜구의 화를 참혹하게 당하게 됐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 붕당 정치처럼 과거사에 미련을 둔 예도 없다. 참으로 지독한 집착이었고 고집이었다. 죽은 자라도 나중에 죄가 밝혀지면 시체를 발굴해 처형하는 부관참시까지 있었으니까. 모역이 드러나면 자식들까지 노비로 삼고 삼족에 죄를 물었다. 과거에 공을 세운 이들의 후손들은 과거 시험에서도 대우를 받았다.

학자들은 선조 때 ‘삼윤(三尹)의 논핵(論劾)’을 붕당의 시초로 본다.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반목이 시작되자 윤현, 윤두수, 윤근수 등 서인 세 명이 탄핵을 받았다는 데서 이같이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의 추천으로 임명된 모 지역 군수 하나가 쌀을 뇌물로 받았다는 사실을 동인이 폭로하면서 문제가 커진 것이다. 이것이 씻을 수 없는 원한의 주 원인이 됐다.

임진왜란 직전 붕당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장님과 같았다. 타협을 외면한 채 오로지 상대의 몰락과 파멸만을 부추겼다. 또 약점과 부정을 캐는 데만 혈안이 되어 나라가 나가야 할 진로를 찾지 못했다.

매일 임금 앞에는 상대 당 인사의 국문을 바라는 상소가 잇달고, 의금부는 해당자를 잡아들이기 바빴다. 임금은 이를 처리하느라 다른 일을 볼 수가 없었다.

지금 한국사회는 조선 선조시기 붕당의 갈등 양상과 너무 닮아있다고 개탄하는 목소리가 크다. 검찰과 국정원은 전, 전 정권의 과거사까지 들추기 시작, 단죄의 칼을 갈고 있다. 국론은 두 동강이 나 적전분열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임명 각료의 잇단 낙마, 안보라인의 불협화음 등 삐걱거리는 모습이 불안하기만 하다.거기다 새 정부의 개혁적인 시책도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난맥상이 보인다. 자동차를 위시한 한국 상품의 해외 수출은 큰 폭으로 감소하고 시장바구니 물가는 너무 올라 서민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집권여당마저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야당은 여당 시절의 생리를 잊은 채 과거 야당의 구태로 회귀하고 있다. 국회에서 헌법재판소장의 인준 부결 후 야당 간부들이 웃고 포옹하는 모습을 국민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국가위기 상황에서 여야는 정쟁을 중지하고 국론분열 행위를 접어야 한다. 오로지 국민의 안위만을 생각해야 한다. 조선 선조시기 일본의 침략을 불러일으킨 붕당의 역사를 답습 않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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