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저수지

배한봉(1962~  ) 

 

꽉 차 있던 새떼들이 떠난 한낮
주남저수지는 다시 꽉 찬다
심연의 바닥이고
물결의 얼굴인 텅 빈 충만.
마음 가장 깊은 곳에도 하늘이 가득 고인다.
하나의 문이
방향에 따라 입구가 되고 출구가 되듯
텅 빔과 충만도 하나의 몸.
그동안 나는
내 속에 너무 많은 것을 넣고 다녔구나.
정오를 넘어서는 시간이
잘 익은 알밤 밀어내는 밤송이처럼
깊게, 깊게 벌어지며
햇빛을 마구 쏟아낸다.
텅 비어서 꽉 차는 저 가을 저수지.

 

[시평]

참으로 계절은 무서운 것이다. 무더위가 언제 그랬느냐 싶게 날이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졌다.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의 물도 이제는 그 푸르름이 다만 푸르름이 아닌, 가을의 빛을 띠어가고 있다. 꽉 차 있던 철새들이 문득 떠나버린 대낮의 저수지. 그래서 가을 저수지 물결의 얼굴은 텅 빈 듯하지만, 그러나 가을의 물빛으로 더 충만하게 보이고 있다. 가을은 이렇듯 그 깊은 심연에서부터 더 높은 하늘까지 모두 꽉 차는 충만의 계절인가 보다.

이러한 가을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텅 빔과 충만이 다른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방향에 따라 입구가 되고 출구가 되듯. 우리의 삶도 실은 이와 같을 것이리라. 텅 빔도 충만함도 궁극에는 하나의 몸. 그런 것도 모르는 채, 우리는 매일 같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다만 집어넣는 데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가. 

가을 철새들이 막 떠난 주남저수지를 바라보며, 텅 비어서, 더욱 꽉 차는 가을 저수지를 바라보며, 어느 덧 우리는 우리의 채우려고만 하는 그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가을 조금씩, 조금씩 더 성숙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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