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산공원에 안창호 선생 내외분 묘비가 마련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정신
말씀비 등으로 공원 곳곳 남아
도산 선생 내외분 묘소도 마련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려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돼라.’

비석 하나가 발길을 멈춰 세웠다. ‘과연 나는 나라를 사랑하고 있을까.’ 내 자신에게 되묻는 순간이었다.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곳곳은 안창호 선생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안창호 선생이 남기고 간 문구들. 시대는 달랐지만 분명 오늘날 우리가 지녀야할 자세이고 정신이었다.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바친 애국정신과 민중의 교화를 위한 교육정신을 국민의 귀감으로 삼게 하려고 1973년 조성됐다.

▲ 도산 선생(오른쪽)과 도산 선생 동상 ⓒ천지일보(뉴스천지)

◆도산 안창호 선생

도산공원 입구에는 도산 안창호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을 주고 있는 안창호 선생의 업적이 담겨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서울의 언더우드 학당에서 수학하며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8세부터 독립협회에 참여해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는 등 한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는 인간의 정직성과 건건한 도덕성을 토대로 사회와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대동단결(大同團結), 무실역행(務實力行: 공리공론을 배척하며 참되고 성실하도록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는 사상) 사상에 기초해 대성학교와 흥사단, 도자기회사와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 이상촌운동을 벌이는 등 인재양성과 경제자립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또 그는 자주독립,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서서 공립협회, 신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독립당 등을 이끌었다. 이를 통해 섬기는 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 도산 안창호 선생 말씀비 ⓒ천지일보(뉴스천지)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동포지도와 국권 회복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다가 상해에서 일제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이송, 두 차례의 옥고를 겪으면서 건강을 잃게 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만 6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안창호 선생의 흔적은 그가 남긴 유품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특히 한쪽에는 안창호 선생이 1920년대 사용하던 책장이 놓여 있다. 짙은 색으로 칠해진 책장. 세월이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책장은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안창호 선생과 함께 했을 책장은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도산이 아들 필영에게 준 연필도 전시돼 있어 지난날을 알려줬다.

◆도산공원에 마련된 도산의 묘소

도산공원 안쪽에는 도산선생 내외분묘소가 있다. 원래 도산 선생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됐었다. 서울시는 1973년10월 10일 도산 선생의 묘소를 이곳에 이장했다. 동시에 미국 로스앤젤러스에서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옮겨와 합장했다.

묘소 앞에 서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암흑기였던 일제강점기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싸워준 그 감사함에 머리가 숙여졌다.

▲ 도산안창호기념관을 시민들이 관람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공원 한쪽에는 안창호 선생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공원을 찾아오는 이들은 우뚝 세워진 동상과 눈을 마주치는 데, 동상은 인자한 미소를 보내는 듯 했다. 곳곳에 세워진 말씀비도 지나는 이들에게 교훈을 줬다.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자 도심의 중심인 서울 강남. 그 안에 살포시 자리 잡은 역사적 공간인 도산공원. 도산 선생의 동상은 오늘도 찾아오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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