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미 작가가 14일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직접 커터 칼을 들고 하드보드지 위에서 작업 방식을 선보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박혜옥 기자] 하드보드지가 놓인 캔버스 위에 그녀가 섰다. 붓 대신 칼을 들었다. 4~5장의 하드보드지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커터 칼로 오려낸 뒤, 다시 겹겹이 쌓아 올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 하드보드지 조각 하나하나를 리드미컬하게 색칠했다. 생동감이 더해졌다. 그림자까지 생겼다. 그림이 살아났다.

자신만의 독특한 형태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서양화가 선미 작가. 그는 4, 5겹의 층을 만들어 그림자의 윤곽으로 요철(凹凸)의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하드보드지를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그의 독특한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작업실로 들어서자마자 벽에 걸린 작품들이 시선을 한눈에 잡아끌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새, 장미, 벚꽃 등의 그림이 오목함과 볼록함을 이루며 새로운 형태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선미 작가는 작품 활동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공간으로 안내했다. 거기엔 오는 28일 개인전에서 선보일 ‘사군자의 그림자’ 시리즈 작품이 방 전체에 가득했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작품 하나하나마다 여러 개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조명을 비춤으로써 여러 겹의 층이 잘 보이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작업실의 한 구석엔 붓과 물감, 그리고 하드보드지에서 오려낸 조각들이 가지런히 놓였다.

사진으로 본 그의 작품과 실제로 본 것은 확연히 달랐다. 그림을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여러 겹의 층이 있고 그 여러 겹의 층에서 그림자의 윤곽이 보였다. 하드보드지를 칼로 일일이 오려내어 채색하고 겹겹이 쌓듯이 접착제로 중첩시켜 놓아 만든 요철로 인해 만들어진 그림자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르죠? 이 부분이 아쉽기도 해요, 그래서 직접 많이 봐줬으면 해요.”

사실, 그의 기법은 사진 촬영으로는 단조로운 평면의 이미지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직접 봐야 레이어와 새로운 이미지 연출이 더 와 닿는다.

선미 작가는 직접 커터 칼을 들고 하드보드지 위에서 작업 방식을 선보였다. 작업 특성상, 하루 종일 서서 작업을 한다. 힘을 모아 일정한 힘으로 한 번에 잘라야 하고 자른 후에는 까칠까칠한 표면을 사포질로 마무리한다. 색 입히기 작업 또한 한 번 칠하는 게 아니라 15번 이상은 해야 한다는 것. 마치 이태리 장인이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한 땀 한 땀 수놓은 정성이 오버랩 됐다.

“자르는 작업은 10년 넘게 하다 보니 괜찮은데 처음에 스케치하는 게 오래 걸려요. 왜냐하면 하나의 장면을 하드보드지 위에서 4~5개로 분리시켜야 하니까요.”

팔이 아플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선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 오는 28일부터 10월 22일까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에서 선보이는 선미 작가의 사군자 작품. (제공: 선미 작가)

선미 작가는 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보통 보름에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재능과 소질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실함, 인내, 끈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개인전을 9회, 단체전을 80회 가까이 했다는 대목에서도 그가 얼마나 미술을 사랑하고 성실하게 임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노동 같은 이 작업 과정을 고수하는 이유는 뭘까.

“이미지를 재조합하는 중에 새로운 이미지가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하드보드지가 만들어내는 레이어 역시 빛과 어둠의 간극을 오가며 오묘한 차이를 연출해내기 때문이에요.”

물론 하드보드지만을 작업 재료로 썼던 것은 아니다.

“종이 작업을 좋아했어요. 다른 재료를 다 사용하고 나서 하드보드지를 선택했는데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재료에 대한 고민은 항상 하고 있어요.”

선미 작가는 어릴 적부터 미술을 좋아했고 그 길을 추구하고 걸어왔다. 반달모양의 눈웃음을 지으며, 어린 시절 미술 학원 문이 열리기 전부터 와서 선생님을 기다릴 정도로 미술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미술이 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선미 작가는 미술로 상을 다 받았을 정도로 재능도 겸했다. 그는 미술을 통해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고 더 나아가 행복감, 성취감을 얻는다고 한다.

선미 작가는 지금껏 일상생활이나 여행에서 인상 깊었던 ‘동물과 식물’ 등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담아 왔다. 지난 추억의 아련한 기억들을 그림에 담고 싶어서다.

하지만 그가 이번 개인전에 출품할 작품은 한국의 명화인 사군자를 단색조로 표현한 신작들이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하드보드지를 통해 레이어드해 현대적인 재료로 과거의 미술을 재해석한 것이다.

▲ 오는 28일부터 10월 22일까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에서 선보이는 선미 작가의 사군자 작품. (제공: 선미 작가)

사군자를 소재로 선택한 계기에 대해 선미 작가는 “지난해 대한민국은 다사다난했어요. 특히 국정 농단으로 전 지역에서 촛불 집회가 올 봄까지 열리기도 했지요. 당시, 정치 및 사회 문제들을 보면서 사군자의 뜻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사군자를 그림자로 표현해 보기로 했어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지만 적폐청산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이어요. 저는 이 시기에 우리 선조가 강조했던 군자의 모습을 되새김질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림자-사군자’ 작업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사군자 작품을 하면서 사진이나 실물을 보고 작품을 했을 때와는 다른, 명화 속의 구도에서 아름다움과 감명을 받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명화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찾아 볼 수는 있지만, 현대미술과는 달리 자주 접하기가 쉽지 않아요”라며 “한국의 고전미술은 일반적으로 특정 계층에게 향유되어 왔고, 더 넓은 계층이 한국의 명화를 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라고 덧붙였다.

‘사군자의 그림자’ 개인전이 끝나고 나서 내년에 선보이는 주제는 네 명의 여성을 주제로 한 ‘사여인상’이다. 또 ‘사여인상’이 끝나고 나면 자신만의 4인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전시할 거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풍겼다.

그의 작품은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함께하고 싶다는 러브콜을 꾸준히 받고 있다. 핸드폰케이스, 의상 업체에서도 그와 콜라보한 작품이 출시되기도 했다.

올해는 선미 작가의 30대의 마지막 해다. 그가 바라는 점은 뭘까.

“10년 전 20대 마지막 인터뷰에서는 30대에 작품을 꾸준히 하는 것을 바랐고, 그 바람대로 30대에 꾸준히 했어요. 40대에서도 꾸준히 작품을 하길 바래요.”

그는 마지막으로 “제 그림을 보고 위안과 행복을 느끼는 팬들한테 오는 응원의 목소리를 들으면 힘이 나고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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