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봉 대중문화평론가

극단 리듬앤씨어터의 특별기획 연극 ‘집나간 아빠(연출 양승걸)’가 공연되는 대학로 해오름소극장에는 소극장치고는 꽤 북적북적한 소리가 들렸다.

자녀들을 데리고 온 아빠도 있고, 아빠의 손을 붙잡고 방문한 딸도 보였다. 연극 집나간 아빠는 가정을 위해 온갖 굴욕과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감내하며 희생하는 우리 아버지의 슬픈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엄마를 등장인물로 한 연극들이 로맨틱 코미디와 더불어 주류를 이루던 시점에서, 아빠를 소재로 한 연극은 그리 많지 않다.

최근 연극무대는 엄마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성황을 이뤘다. ‘친정엄마’ ‘친정엄마와 2박3일’ 등 공연 작품들은 스타 캐스팅이란 호재도 있었지만 누구나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엄마라는 소재로 승부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빠가 등장했다. 극단 리듬앤씨어터가 아빠를 주제로 새로운 카드를 내민 것인데 극은 서울의 변두리의 쪽방촌에서 벌어진다. 가난에 치이며 쪽방촌에 몰려든 남녀는 각자의 아픔을 내면에 지닌 채 살아간다. 엄마와 나이든 딸, 약장수로 살아가는 아빠와 어린 딸의 이야기가 차분하게 전개되다가 때로는 폭풍처럼 가슴을 때리기도 한다. 실업자 가정의 아픔을 다룬 사회풍자 코믹극이자 가족극 ‘아빠들의 소꿉놀이’와 아버지에 대한 딸의 효성심이 주제가 된 ‘아빠의 바다’ 정도만 보일 뿐, 절망적 상황 속에서 가족을 위해 세상과 싸우고 내색 한번 않고 묵묵히 감내하며 희생하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건 작품들은 여전히 헝그리하다.

연극 집나간 아빠는 온갖 막일을 해 가며 아이를 키우던 중,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아빠는 노인을 상대로 한 엉터리 약장사 조직에서 약을 팔게 되는 이야기다. 연극은 도입부터 미드포인트를 지나 클라이막스에 이르기까지 고립된 아버지의 모습을 계속해서 표현하고 그러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 아이의 감정을 잘 묘사한다.

어쩔 수 없이 돈 때문에 딸과 생이별하고 돈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건강보조식품을 노인들에게 팔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아버지 상철의 인생은 모두의 무관심 속에 하루하루를 옥죄며 다가온다. 아빠가 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상철의 딸은 전국글짓기대회에서 ‘집나간 아빠’라는 제목의 글로 대상을 차지한다. 이를 계기로 결말 부문에 상철과 수림은 서로의 딸과 어머니와 함께 새로운 가족으로 재탄생하며 행복한 미래를 다시 꿈꾸기 시작한다.

연극 집나간 아빠에 출연한 등장인물들의 화법은 무척 공감적이다. 현실에 불만을 표시하지만, 정감 가는 화법과 잘 짜인 플롯은 사실감을 극대화하며 잔잔하면서도 가족을 한 번 더 생각하게끔 원동력을 제공한다. 이 연극은 현실에 치이고 무언가에 얽매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며 그래서 존재하고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강조한다.

연출을 맡은 양승걸씨는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그런 아픈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절박한 것인지, 어떠한 희망을 가지고 소중한 하루를 살아야 하는지, 가정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연극은 코믹하면서도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감동이 담겨져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이야기가 진솔하게 펼쳐진다. 현실적인 화법과 이야기 구조로 사실감이 극대화된 것도 특징이다.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는 미장센이다. 80년대 초중반을 되새겨 볼 수 있는 3평 남짓의 쪽방촌 내부는 오랜 옛날 삼양동, 봉천동 달동네의 무허가 판자촌을 연상하게끔 리얼리티를 제공한다. 더불어 등장인물들의 실제적 감정을 조명의 디테일로 표현하며 희미했던 과거 시절의 우리의 슬픈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 겸 연출, 제작에 배우까지 4역을 맡은 양승걸씨는 현재 왕성하게 활동 중인 최인숙, 정란희를 포함한 연극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신인배우 윤도원, 아역배우 김리원 등 다양한 세대의 배우들을 출연시키며 앙상블에도 힘을 썼다. 연극 중간 중간에 표현된 아역배우의 잔잔한 내레이션도 극의 흐름에 힘을 보태며 가족의 가치를 되새김질 하게 했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연극의 곳곳에 삽입된 음악의 대부분이 연출가 취향의 7080 팝으로 구성돼 있고 이야기의 전개와 관계없이 극의 흐름을 깨뜨리는 등장인물의 연계성 없는 출연은 수정돼야 할 대목이다.

현실의 아픔을 받아내고 갈등하는 인물들 간의 충돌은 결국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고 멈추지 않는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극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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