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문화재의 소중함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아리랑, 한복, 씨름. 주변에서 쉽게 접해 그 소중함에 무기력한 건 아닐까. 반면 주변국에서는 우리 것의 가치를 깨달아 자국의 것으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우리에게 처한 문화재의 실태를 알고, 문화재를 지켜나가는 방법을 모색해본다. 또 우리의 무형문화재 중 정선아리랑을 통해 우리 것의 역사적 가치와 소중함을 알아본다.

 

▲ 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 유영란 명창이 정선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 유영란 명창

삶·애환 담겨 전해지는 노랫말
가사 수 5천수, 타지방보다 많아
농사일, 남녀사랑 등 내용 담겨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소리(아리랑)를 배우고 나서 생각해보니, 할머니가 바느질하고 콩을 고르실 때 흥얼거리시던 게 정선아리랑이었어요.”

정산아리랑 기능보유자인 유영란 명창(정선아리랑보존회장). 수십 년 간 정선아리랑을 지켜온 그는 시간이 갈수록 우리 것의 소중함이 더욱 커진다고 했다. 할머니 세대 아니, 그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리랑. 그 속에는 삶 속의 애환과 정서가 그대로 담겨 전해지고 있었다. 아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인 것이다.

◆고려 말부터 이어져 온 노랫말

정선아리랑은 시원으로 볼 때 아리랑 중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말엽 조선창업을 반대한 고려 유신(遺臣) 72명이 송도(松都, 개성) 두문동(杜門洞)에 숨어 지내다가 그중 7명이 정선으로 은거지를 옮긴다. 이들은 여생을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지만 고려왕조에 대한 흠모와 두고 온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그 외롭고 고달픈 심정 등을 한시로 지어 읊었는데, 세인(世人)들이 이를 풀이해 부른 것이 ‘정선아리랑’이라고 한다.

“옛날의 정선은 지금보다 더 산골이었죠. 산을 개간해서 작은 밭을 만들었는데, 밭에 갈 때 고개를 넘어야 하니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흥겨운 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긴 아리랑을 노동요로 많이 불렀습니다.”

반면 어르신들이 일을 마치고 저녁에 막걸리 한잔 드시면서 새끼를 꼬고 이야기하면서 놀 때는 똑같은 가락이지만 빠르게 한 ‘자진아리랑’을 불렀다.

“정선아리랑의 특징은 가사가 5천수가 넘습니다. 다른 지방보다 훨씬 많죠. 시집살이, 어려운 농사일, 신세 한탄, 남녀의사랑 등의 내용이 담겨 오늘날에도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 정선아우라지 초슬달 모양의 오작교와 팔각정 ⓒ천지일보(뉴스천지)

◆완벽한 악보 불가능… 삶, 애환 표현 못 해

아리랑은 완벽한 악보를 만들 수는 없다고 한다. 설사 악보를 적어 그대로 따라 부른다 해도 전혀 다른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노랫가락에 담긴 삶의 애환과 정서는 마음으로 느끼고 불러야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었다.

전통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아리랑은 인기도 적고 대중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전통을 지키는 것은 많이 힘들죠.”

이에 유 명창은 전통을 지키려는 이들을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경제적 지원을 해줘야한다고 언급했다.

“전통은 우리의 뿌리입니다. 옛 어르신들의 이야기, 우리 삶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뿌리를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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