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준 민속 칼럼니스트 

 

조선시대는 유산상속을 어떻게 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시대가 남존여비사상이 지배했고 양반과 노비가 구분된 계급사회기 때문에 유산을 상속할 때도 당연히 남자와 여자, 적처 소생과 첩 소생 간의 차별이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놀랍게도 조선중기까지는 남자와 여자, 형과 아우를 구분하지 않았고 첩의 자식들에게까지 골고루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제사도 아들 딸 구분하지 않았고 똑같이 돌아가며 지냈다. 이를 ‘균분상속(均分相續)’이라 했다.

재산상속 내용을 담은 문서를 ‘분재기(分財記)’라 불렀다. 분재(分財)는 크게 3가지로 나눴다. 부모가 자식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재산을 분할하면서 작성한 분재기를 ‘분급(分給)’, 부모가 사망한 후 자식들이 부모 재산을 나누며 작성한 분재기를 ‘화회문기(和會文紀)’, 과거급제나 결혼 등 특별한 사유로 재산 일부를 증여하는 ‘별급(別給)문기’가 있다. 

조선시대 법전 ‘경국대전’에 따르면 딸, 아들 구별 없이 재산을 동등하게 상속했다. 제사를 지내는 자손에게 1/5을 더 주고, 서자에 대한 차별로 양민 첩 자녀에게 1/7, 천민 첩 자녀에게 1/10을 줄 것을 명시했다.

여자가 친정에서 가져 온 재산은 처분권도 전적으로 여자에게 있었다. 부부의 재산은 통합하지 않고 구분해 놓았다. 즉 여성을 상당히 배려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재산의 양은 많지 않지만 노비도 자신의 아들, 딸에게 상속이 이루어졌다. 후손들에 의해 분실되고 전해지는 것이 드물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차등상속으로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성리학 중심의 유교체제가 사회 질서로 뿌리내리면서 조상제사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고 이에 따라 재산상속도 맏아들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에는 겉으로는 재산을 균등하게 분할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재로는​ 조상이나 부모에 봉사하는 장남을 우대했다. 

부모의 제사도 딸에게는 맡기지 않고 아들이 번갈아가며 지내도록 재산분배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남성중심사회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재산분할을 합의한 후 남자는 한문 이름으로 서명을 했고, 여자의 경우 왕실에서는 네모난 붉은 도장, 양반은 네모난 검은 도장, 평민이나 천민 여성의 경우는 손바닥 모양을 찍어 서명했다. 

상속 대상은 재산 가치가 있는 토지, 노비, 집, 제기, 서적, 솥, 요강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반면 상속 내용에 불만을 품고 부모를 상대로 자식들이 소송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부모가 내린 처분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불효라는 유교 윤리의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식 없이 죽은 여자의 재산을 둘러싼 소송, 적처 소생과 첩 소생 간의 재산 소송 등 특이한 경우에만 소송이 진행됐다. 

이처럼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유산상속이 오늘날보다 더 균등하고 그 분배과정이 투명했다고 볼 수 있다. 

부모 역시 법에 어긋나거나 자식들이 불만을 가질 만큼 상식에 어긋나게 재산상속을 하지 않았다. 

부모와 형제 간 서로 협의해서 결정하는 ‘화회(和會)’라는 통로를 통해 공정하게 재산상속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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