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를 관람하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한양도성박물관 ‘흥인지문, 왕을 배웅하다’ 展
예로부터 왕들이 밖 오갈 때 자주 이용
다른 문보다 규모와 위상 등 차원 높아
한양도성 성문 중 옹성 갖춘 유일한 문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시대 국장행렬과 능행길의 통로로 이용하던 한양도성의 ‘흥인지문’. 오늘날 서울 종로구에 위치하고 있다. 흔히 동대문이라 불리는 흥인지문은 오늘날 주변에 시장이 형성돼 많은 이들이 찾았다. 조선시대에도 흥인지문은 왕들이 밖을 오갈 때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나라의 지존인왕이 드나들어서일까. 규모와 위상 등은 다른 문보다 차원이 높아 보였다.

◆조선시대 흥인지문

흥인지문은 한양도성의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춘 문이다. 도성의 정동(正東)에 건축돼 오늘날 서울 동대문 밖의 근처지역으로 거둥하는 왕의 행렬이 주로 이어졌다.

조은주 한양도성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옛 조선시대 흥인지문은 왕들이 드나들었던 문 중 하나였다”며 “왕이 죽어서 장례행렬이 나가게 되면 마지막에 흥인지문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이어 “또 선왕이 죽었을 때 다음 왕들이 선왕을 추모하기위해 제사 지내러 갔는데 그때 이용한 문이 흥인지문”이라고 말했다.

▲ 국장도감의궤 반차도(규장각 한국학연구원)(제공: 한양도성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영조의 국장행렬

한양도성 동북쪽에 위치한 동구릉은 태조를 비롯한 여러 선왕들이 묻힌 곳이다.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장소인 셈이다. 동쪽에 있는 능은 조선시대에 동릉이라고 불렸으며, 조성된 능의 수에 따라 ‘동오릉’또는 ‘동칠릉’이라 칭했다. 조선의 왕들은 능행이나 왕실의 장례를 위해 흥인지문을 통해 행차했다.

궁중예제에 관한 책인 ‘국조상례보편’에 따르면, 1776년 치러진 영조의 국장은약 27개월간 진행됐다. 7월 26일 영조의재궁을 실은 대여가 흥인지문을 거쳐 원릉으로 출발했다. 정조는 흥인문까지 따라갔다가 하직례를 올리고 환궁했다. 대여가 지나가기에 흥인지문의 홍예 높이가 부족했다. 이 과정에서 선조들은 지혜를 발휘했다.

조 학예연구사는 “기록에 보면 영조 국장행렬 시 대여가 너무 커서 흥인지문의 바닥 돌을 뺀 후 대여를 이동시켰다. 이후 다시 껴놨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설명했다.

대여의 무게가 상당히 무거웠기에 여사군(轝士軍: 국상 때 가마나 상여를 메는 사람)을 12곳으로 나눠 각 교대처마다 군사190명과 예비군 4명씩 총 2328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 백사모 ⓒ천지일보(뉴스천지)

◆고종의 능행길

능행은 임금이 선대왕의 업적을 기리고 왕권 계승과 지배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고종은 즉위 후 매년 1~2차례의 능행을 거행했다. 특히 매년 가을 동릉에 거둥해 태조의 건원릉과 양부인 익종의 수릉을 자주 찾았다.

동릉으로의 능행 시 고종은 날이 밝을 무렵 흥인지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갔다. 능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능에서부터 흥인지문까지 백성들의 상언(上言)을 받았다. 이때 지방 관리를 불러 민생의 형편을 묻기도 했다고 한다.1892년 조선개국 500주년을 맞아

고종은 매년 능행하던 수릉을 비롯해 태조의 건원릉, 선조의 목릉, 영조의 원릉 등을 찾았다. 어가가 지나는 도로는 깨끗하게 정비됐고, 백성들은 왕의 행렬이 지나가는 길을 침범하지 않는 한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 전시를 관람하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19세기 말 한양을 찾았던 서양인들의 기행문에도 당시 모습이 잘 담겨있다. 고종의 마지막 흥인지문 밖 행차는 1919년의 국장행렬이었다. 대여에 실린 고종의 마지막 모습을 배웅하기 위해 성문 주변에 백성들이 운집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처럼 흥인지문은 문의 역할을 넘어 왕들과 백성들의 삶이 얽힌 곳이었다.

한편 한양도성박물관의 2017년 기획전인 ‘흥인지문, 왕을 배웅하다’ 전(展)은 7일부터 12월 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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