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송강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 후,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돼 지은 <관동팔경>이 있다.

얼마 전엔 세월에 잊혀져가는 선인들의 발자취를 기행으로 다뤄 보기로 하고 우선 관동팔경의 하나인 숙종 때 지어진 청간정(淸澗亭)을 찾았다.

청간정은 남한의 동쪽 최북단에 자리 잡은 고성군(固城郡) 토성면(土城面) 청간천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일대엔 김일성 별장이 바다를 내려다보며 또 주변 풍광을 자랑하며 앉아있다.

그 별장 뒤편엔 화진포가 있는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의 별장이 호수를 사이에 놓고 마주하고 있다. 세월의 뒤안길에서 둘은 마주 앉아 무엇인가 회한에 젖어 마치 대화라도 나누는 것 같다.

그런데 화진포 언저리에 자리 잡은 이승만 별장 아랜 한 여인이 외로이 서서 화진포를 응시하고 서 있는데, 곧 화진포 설화 속 주인공의 여인상이다.

화진포가 생기기 전 인색하고 성질이 고약한 ‘이화진’이란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다. 어느 날 스님이 시주하러 왔는데, 맘씨 고약한 이화진은 곡식 대신 소똥을 퍼주었다.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 없이 그 소똥을 들고 나갔다. 마침 며느리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얼른 쌀을 퍼서 스님께 드리며 시아버지의 무례함에 대신 용서를 빌었다. 스님은 시주를 받으며 “나를 따라 오면서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며느리가 고총고개에 이르렀을 때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돌아보니 이미 이화진이 살던 집과 논밭은 모두 물에 잠겨 호수가 되었으니 그 호수가 바로 지금의 화진포다. 며느리는 애통하다 그만 돌이 되어 버렸다는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구약성경에서 롯의 처도 불 심판 당하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도망하는 중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는 장면이 있다. 이 화진포의 설화와 구약성경 속 롯의 이야기는 분명 닮은꼴이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특히 예로부터 지명마다 사연과 유래가 있다. 그리고 그 유래 속에는 당 시대의 사연이 담긴 것이 분명하지만, 그 시절 그 사연을 통해 먼 훗날 후세대에게 무엇인가를 알리고 가르치려는 절대자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여러 모양과 형태의 종교(종파)로 나타났다. 즉, 때가 될 때까지는 깨닫지 못하니 각자가 모시는 신(神)을 좇아 그저 그렇게 섬겨 오게 한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도 보면 예수의 사도 중 가장 예수를 핍박하고 조롱했던 당시 종교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바울은 그의 전도여행 가운데 당 시대에 온갖 학술과 철학의 전성기를 맞고 있던 아덴(그리스 아테네) 지방을 찾게 되었을 때,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그리스 철학자들과의 쟁론 가운데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神)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라 하며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하였다.

이 말을 빌리자면 당시 그리스는 진정한 신(神)에 의해 생겨난 종교가 아닌, 온갖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이 범람해 그것이 결국 종교로 이어져 수많은 인학과 신학의 혼돈 속에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는 바울의 증거에서 보듯, 종교성이 많아 알 수 없는 신에게라도 의지하고자 했던 당 시대의 종교상을 대변하는 내용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 왜 너희들이 이러한 생각과 종교생활을 하는지를 알게 해 주겠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 답이 곧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일러줬던 것이다.

결국 한 절대자의 절대 섭리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을 허락받지 못해 지금까지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할지라도, 이젠 그 섭리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해 줄테니, 들을 귀를 허락받아 제발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의 답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하나의 종교(宗敎)였다. 갈기갈기 찢겨지고 흩어진 종교의 길이지만 깨닫고 보면 하나의 신(神)을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또한 예부터 전해오는 말?우화?설화 등 수많은 구전(口傳)과 풍습과 습관이 의미 없는 게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2천년 전 아덴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종교성이 많은 민족이다. 어디든, 무엇이든 거기에는 절대자의 한결같은 뜻이 담겨있고 숨어 있음을 깨닫기를 간구해야 한다. 그래서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다’는 말씀에서처럼 우리 내면의 종교성이 충족되고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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