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북각루(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 후기 토목건축의 백미
한국전쟁 때 피해 입게 돼
‘화성성역의궤’ 토대로 복원

4대문, 장대, 포루 등 구성
아름다움과 강인함의 조화
곳곳서 정조의 지혜도 느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성곽의 꽃’ ‘최초의 계획 신도시’. 다양한 키워드를 지닌 이곳은 어디일까. 바로 정조(조선 제22대왕)의 ‘수원화성’이다. 아름다움과 과학이 어우러진 수원화성에 대한 소문은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수원화성에 와 봤다면 절로 그 말이 이해될 것이요, 아직 와보지 않았다면 함께 수원화성 한 바퀴를 돌아볼까.

◆정조 효심 담긴 수원화성

서울에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수원화성. 먼 거리가 아니어서 찾아가기 쉽다. 기자는 급행 버스를 타고 장안문에서 내렸다. 도성 안에 정류장이 있다니, 느낌이 새로웠다. 장안문 안내소에서 받은 팜플렛을 펴니, 수원화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원화성이 이렇게 생겼구나.’ 역시 와봐야 안다.

조선시대 성곽 중 으뜸인 수원화성. 개혁적인 통치자 정조와 실학자들이 지은 성곽 도시로, 조선후기 토목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수원화성 건설은 정조의 효심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했을 정조, 그리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이곳 수원화성에서 시간을 보냈을 정조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수원화성은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었지만, ‘화성성역의궤’를 보고 1700년대 당시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덕분에 정조의 지혜는 곳곳에 남아 있었다. 또 역사가 그대로 보존되면서 주변으로 교통과 도심이 조화롭게 발달해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돼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제 발걸음을 재촉해 보자.

▲ 수원화성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장안문과 ‘서북공심돈’

수원화성은 4대문, 장대, 포루, 봉돈, 수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를 둘러보기 위해 4대문인 장안문, 화서문, 팔달문, 창룡문 방향으로 걸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것이다.

기자가 서 있는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장안(長安)’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은 모습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장안문에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시설이 있었다. ‘적대’라고 한다. 반은 외부로 돌출돼 있고, 반은 성 안쪽으로 돌출돼 있는데, 성안으로 들어오려는 적군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곳이었다.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만 설치했다.

10분 정도 길을 걸으니, 길쭉한 모양의 건물이 보였다. ‘서북공심돈’이다.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이다. 이는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췄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정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고 한다.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효과적인 재료 활용을 보여주는 서북공심돈은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서북공심돈 옆에는 ‘화서문’이 있다.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다른 대문과 달리,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만큼 가치는 더욱 커 보였다.

▲ 수원화성 서장대ⓒ천지일보(뉴스천지)

◆‘서노대’와 ‘서장대’

이곳에서부터는 성벽을 따라 산을 올라야 했다. 산이 높지 않아 오르는 건 그다지 힘들진 않았다. 산세를 구경하며 걸으면 금방 꼭대기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벽돌로 쌓아 만든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무엇일까.

‘서노대’라고 불리는데,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이다. 현재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두 곳이 있다.

 


그 앞으로는 ‘서장대’가 있었다.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정조는 1795년(정조19) 현륭원(융릉)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했다.

서장대에서 바라보니 ‘화성행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화성행궁. 혜경궁 홍씨와 함께 한 온기가 남아있는 듯 아름다웠다.

▲ 수원화성 창룡문 ⓒ천지일보(뉴스천지)

◆팔달문과 창룡문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내리막길이다. 촘촘히 쌓인 성곽길을 따라 내려오니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까지 왔으면 수원화성 절반을 돈 것이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팔달문은 정조와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통과했던 곳이다.

팔달문 주변으로는 로데오거리와 시장이 발달돼 있다. 인파가 붐비는 이곳은 정겨움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영동시장을 지나 성벽을 따라 길을 걸었다. 저 멀리 ‘봉돈’이 보였다. 비상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던 통신시설인 봉돈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벽돌을 쌓았다. 그 위에는 5개의 화두를 쌓았다. 성벽에 총안(銃眼: 총을 내쏠 수 있도록 뚫어놓은 구멍)을 두어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5분 정도 더 걸으면, 마지막 4대문인 ‘창룡문’이 나온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 쪽을 열어놓았다.

▲ 방화수류정 ⓒ천지일보(뉴스천지)

◆꽃 찾고 버들 따라 노니는 ‘방화수류정’

저 멀리까지 잔디가 깔린 창룡문 안 풍경은 신비로웠다. 장수가 지휘하던 동장대(연무대)가 있고, 도심을 안고 있는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어 수원화성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장안문 방향으로 조금 길을 걸으니, 물줄기가 나왔다. 북수문(화홍문) 아래로 흐르는 물은 무릉도원을 떠올릴 만큼 아름다웠다.

북수문 주변에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방화수류정(동북각루)’도 있었다. 이곳은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 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정자에 앉으니 마음속 근심이 싹 지워지는 듯했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도 이곳에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주변 경치를 감상했겠지.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찾는 수원화성은 역사와 현대가 어우러지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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