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준 민속 칼럼니스트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에 연호(年號)를 단군기원(檀君紀元)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됐다. 단군기원의 줄임말인 ‘단기(檀紀)’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고조선을 세워 즉위한 BC 2333년을 원년(元年)으로 하는 한국의 연호(年號)다. 

1948년 9월 12일 133명의 재석국회의원 중 106명의 찬성으로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는 단군기원(檀君紀元)으로 한다”는 내용의 ‘연호에 관한 법률(법률 제4호)’이 의결됐고 같은 해 9월 25일부터 단기연호가 시행됐다. 

단기를 처음으로 쓴 것은 고려 말의 백문보(白文寶)로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단군기원을 언급하면서부터다. 

단군기원은 단군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 ‘삼국유사’ ‘단군고기’ ‘위서’ ‘자치통감외기’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등을 종합해 추정했다. 이들 기록은 “단군이 건국한 뒤 단군 조선이 1048년간 다스려졌고, 이로부터 164년 뒤인 주(周)나라 무왕(武王) 원년에 기자(箕子)가 나라를 세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주나라 무왕 원년이 BC 1122년이므로 여기에서 소급하면 BC 2333년이 단군기원이 된다. 

금년은 단기 2333년에다 서기 2017년을 더하면 단기 4350년이다. 때문에 한민족은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라고 부르고 자랑스러운 단군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기연호마저도 잊혀져가고 있다. 5.16군사정권에 의해 1961년 12월 2일 법률 제 755호 ‘연호에 관한 법률’의 제정 시행으로 1962년 1월 1일부터 서기연호를 사용하고 단기연호를 폐지했다. 당시 단기연호를 폐지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문명국가의 체면을 유지하고 우리나라의 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했다. 단기를 사용하면 야만국이라는 논리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13년 3개월 동안 모든 정부문서와 달력도 단기력을 사용했다.

당시 단군기원으로 역사를 배우던 학생들은 훈민정음 3779년, 임진왜란 3925년, 을사늑약 4238년, 경술국치 4243년, 기미 독립선언 4252년…이라고 외웠으나 1962년 1월부터 모든 연도에서 2333을 빼고 외워야 했다. 훈민정음 3779-2333=1446, 임진왜란 3925-2333=1592, 을사늑약 4238-2333=1905, 경술국치 4243-2333=1910, 기미 독립선언 4252-2333=1919… 이렇게 역사는 엉키고 꼬이게 됐다는 것이다.  

연호는 과거 황제나 왕이 통치하는 국가에서 새로운 군주가 즉위하면 자신의 재위 연대, 즉 치세연차(治世年次)에 붙이는 칭호로 사용했다. 연호의 사용은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건원(建元)에서 시작됐으며, 일본, 월남, 대만 등에서도 사용했다.

우리는 536년 신라 법흥왕 23년에 독자적으로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조선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않다가 갑오경장 때 개국연차를 계상해 1894년을 개국기원 503년으로 표기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광무(光武), 융희(隆熙) 연호를 사용했다. 

단기 폐지 이후 사회 각계에서 서기와 함께 단기를 함께 쓰자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그러나 2012년 법제처는 “단기를 함께 쓸 경우 불기(佛紀), 공기(孔紀)도 문제될 수 있어 단기연호를 공용연호로 쓸 수 없다”고 밝혔다. 참 어처구니없는 답변이다. 우리 선조들이 세운 최초의 국가 ‘고조선’과 ‘단군왕검’의 실존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얼빠진 민족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한민족 정체성의 회복은 단기연호 복원으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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