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가 창간 8주년이자 94년 전 발생한 일본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 사건 발생일인 9월 1일을 맞아 관동대지진 학살사진과 당시 지진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미공개 사진을 두 번에 걸쳐 공개한다.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도 정성길 명예박물관장으로부터 입수한 사진 중 5점을 공개한다.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은 1923년 9월 1일 일본 수도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역에 진도 7.0이상의 강진이 발생한 뒤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정부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트려 6천여명(독립신문 발표)에서 많게는 2만 3천명 이상(독일 문헌 등)의 한민족을 대학살한 사건이다.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을 범죄행위로 규정하는 국제법)로 인정되어야 할 만한 중대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계속해서 정부 차원에서 이 같은 역사적 사건을 자국 교과서 내용에서 수정·삭제 등으로 덮어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국사 교과서에조차 언급이 안 되고 있으며, 어떠한 정부차원의 규명작업이 없어 잊어져 가고만 있다. 이러한 안타까운 작금의 현실 속에 관동대지진 학살 95주기를 즈음해 94주기를 맞은 이 사건을 범국민적으로 상기하고자 본지가 관련사진을 공개한다.

 

▲ 요코하마 해변가 둑길에서 시신이 한 데 모아져 있고, 자경단들이 서 있는 모습이다. 이는 자경단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日, 부정하려는 움직임 확산
“자경단 손에 든 건 살해도구”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관동대지진 발발일을 앞두고 당시 일어났던 조선인 대학살 사건에 대해 일본에서 이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확산돼 공분을 사고 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그간의 관례를 깨고 올해 희생자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내지 않기로 한 데 이어 추도비가 마련된 도쿄 스미다구의 야마모토 도오루 구청장도 매년 보내던 추도문을 올해부터는 보내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매년 9월 1일이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조선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단체에서는 스미다구 내 요코아미초 도쿄도립공원의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추도식을 열어왔다. 추도식을 주최해온 일·조협회에 따르면 야마모토 구청장이 3월과 9월에 열리는 도쿄도 위령 협회 주최 추도 법회에서 희생자 모두에 대해 추도하는 만큼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별도의 추도문을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일본 극우들이 당시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 폭동에 대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분위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고이케 도쿄도지사는 차기 총리 후보로도 거론되는 극우 성향 정치인이라 극우 세력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셈이다. 일본 정부 역시 관동 대지진에서의 조선인 대학살을 부정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5월 각의를 통해 당시 학살 사건과 관련해 유감의 뜻을 표명할 계획이 없다고 공식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본지가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도 5점의 관동대지진 관련 미공개 사진을 공개한다.

먼저 위의 사진은 시신을 한 데 모아 놓고 자경단이 하나같이 다 꼬챙이 혹은 몽둥이 등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시신 중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것도 있다. 사진 장소는 요코하마 해변가 둑길이다. 당시 이곳에서는 하역작업을 하는 조선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 자경단에 의해 죽은 사람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경단은 다리를 건너는 길목에서 검문을 해 조선인일 경우 그 자리에서 때려죽이거나 체포해서 집단으로 모아 때려죽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속 자경단 무리 중에서 오른쪽 2번째가 우두머리며, 왼쪽 상단에는 자전거가 보인다. 이 자전거가 우두머리격인 사람이 수색하기 위해 타고 돌아다니다가 잠깐 세워놓고 상황을 살피고 있는 모습인 것으로 봐진다.

일본 내에서는 이 사진에 대해서도 ‘지진으로 희생된 자들이다’라고 끊임없는 변명을 늘어놓기 바쁘다. 이에 대해 정성길 명예박물관장은 “감나무 아래에서 장대를 들고 있으면 감을 따먹으려고 있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감나무 아래에 서 있겠냐”고 말했다. 이는 자경단이 들고 있는 물건들이 구조 활동을 위한 것들이 아니라 전부 몽둥이나 꼬챙이들을 들고 있기 때문에 이같이 비유한 것이다.

곧 자경단이 시체들 앞에서 이런 살인도구를 쥐고 있다는 것이 재난구조 활동을 위한 것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일본의 몇몇 교수로부터 항의 메일을 받았던 정 관장은 이같이 반박하자 그들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꽁무니를 뺐다.

▲ 관동대지진 발생 후 바로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일본 군대가 분주하게 내리는 모습이다. (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나머지 사진들을 살펴보면 차에서 일본 군대가 분주하게 내리는 모습이다. 사진 기록자는 관동대지진이 크게 발생한 후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여러 군대가 도쿄와 요코하마의 거리를 순찰하러 다녔다고 기록했다.

▲ 요코하마 강둑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 뒤로 화염에 휩싸인 모습이다. (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요코하마 강둑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 뒤로 화염에 휩싸인 모습이다. 지진으로 인해 화재가 많이 발생했는데, 이 화재를 일본은 조선인들이 방화를 했다고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자경단을 자극해 살해하도록 했다.

▲ 화재와 지진으로 인해 수천명의 사람들이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 온 모습 (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 구호 물품으로 100만개의 매트를 배로 도쿄까지 싣고 와서 내리고 있는 사진이다. (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화재와 지진으로 인해 수천명의 사람들이 도망쳐 모인 안전한 곳으로, 이곳은 1921년의 거대한 화재 때 만들어진 곳이다. 마지막 사진은 구호 물품으로 100만개의 매트를 배로 도쿄까지 싣고 와서 내리고 있는 사진이다.

한편 정성길 관장은 50년 가까운 세월을 전 세계를 돌며 약 7만장의 근현대사 기록사진을 모았다. 그중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에 대해 규명하기 위해 30년간의 세월을 투자했고, 여생동안 이것만큼은 한 세기(100년)가 가기 전에 꼭 결실을 맺으려고 하고 있다.

그는 2500장의 관동대지진 관련 사진 중 460장 정도를 선별해 책으로 엮어 곧 세간에 공개하기 위해 준비 중이고, 현재 1차 편집을 완료한 상태다. 그 가운데 일부 사진을 본지에서 먼저 공개함으로써 살짝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정 관장은 “책은 개인의 이익보다도 국가의 책무를 대신하는 것”이라며 “일본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은 실제로 있었고, 이를 구전(口傳)으로 알릴 것이 아니라 기록사진을 통해 일본이 자신들 선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더는 항변할 수 없게끔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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