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제12부 해관(解官) 제2조 귀장(歸裝, 돌아가는 행장)에는 성종 때 청백리 이약동(1416∼1493)의 이야기가 나온다. 

- 제주목사 이약동이 돌아갈 때에 채찍 하나만 가졌을 뿐이었는데,   “이것도 제주도의 물건이다”라고 말하고 관아의 문루(門樓)에 걸어 두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목사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내어 걸어 놓았다. 세월이 흘러 채찍이 낡아버리자 고을 사람들은 처음 채찍을 걸어 두었던 곳에 그 흔적을 그림으로 그려 사모하는 뜻을 나타냈다. 

이약동이 바다를 건너 올 때에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갑자기  배가 기울고 맴돌아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약동이 말하기를, “나의 행장에 떳떳치 못한 물건은 하나도 없는데, 막객(幕客)중에 누가 나를 속이고 욕되게 하여 신명이 나에게 경고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당초에 제주 군교들이 그가 유장(儒將)으로 천거됐으므로 갑옷 한 벌을 싸서 몰래 수행원에게 맡기고 바다를 건넌 뒤에 알려드리도록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실대로 고하자 이약동이 갑옷을 물에 던져버렸다. 그제야 풍랑이 가라앉고 배가 제대로 움직였다. 지금도 그 곳을 ‘투갑연(投甲淵)’이라고 부른다. -

깔끔하게 떠나는 공직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약동은 청렴했을 뿐만 아니라 인의(仁義)를 갖춘 공직자였다. 애민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1472년에 이약동은 공물의 수량을 감해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사냥할 때 민폐를 제거했다. 1472년 2월 23일자 성종실록에 나온다. 

- 성종이 이약동에게 하서(下書)하기를, “공진(供進)하는 모든 물건을 민간에 강요하니, 그 폐단이 작지 않다. 이제부터는 노루 가죽은 50장에서 10장만 올리고, 진주(眞珠)는 얻는 대로 올려라. 

이제 들으니, 세 고을의 수령이 사냥하는 데 하룻밤을 지내더라도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서 거처하므로 그 폐단이 많다 하니, 대저 임금의 거가(車駕)가 이르는 곳도 다만 장막을 설치할 뿐인데, 신하된 자로서 어찌 이같이 할 수 있느냐? 민폐를 제거하도록 하라. -

또한 이약동은 백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공직자였다. 당시에 산신제를 지내는 산천단은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 있어 제사 때가 되면 많은 이들이 며칠씩 산에서 야영을 하며 행사를 치렀는데 혹한기에는 얼어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약동은 이러한 폐단을 조정에 보고해 산천단을 한라산 중턱으로 옮겼다. 산신제 때문에 백성이 죽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제주시 한라산 중턱의 곰솔공원에는 산천단 이설 관련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약동은 1477년에 대사간에 올랐는데 직언으로 직분을 다했다. 서거정의 시가 전한다. 

- 태평성대에 당당하게 언로가 열리니    
간관의 자리에 다시 어진 이를 얻었네. -

이후 이약동은 1487년 이조참판, 1489년 개성유수를 하다가 1491년에 사직했다. 

1493년에 이약동이 별세하자 조정은 조회를 정지하고 평정(平靖)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일을 맡음에 법도가 있었고(平), 온유한 덕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잘 끝마쳤다(靖)’는 뜻이다. 

경상북도는 청백리 이약동을 ‘2017년도 경북의 역사인물’로 선정하고 선양 사업을 벌이고 있다. 청백리 고양은 청렴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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