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서울역에서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만리동 고개 옆으로 손기정체육공원과 손기정기념관이 있다. 손기정 선생 1백주년 해인 지난 2012년 개장한 이곳은 1905년 설립된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 옛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평소에는 공원 주변 주민들이 운동을 위해 찾고, 간간이 스포츠역사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지난 수년간 스포츠학자와 전·현직 스포츠언론인들이 주축을 이룬 스포츠포럼 21(상임대표 임태성 한양대 교수)은 손기정 선생의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한 세미나를 매년 개최하기도 했다.

손기정기념관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29분19초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선생의 모교로 일제강점기 압박과 설움을 견디며 민족의 긍지를 세운 그의 업적을 되돌아보게 한다.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기념관 1층 상설전시실에는 손 선생이 베를린올림픽 때 사용했던 신발과 사인 및 우승 부상품으로 받은 고대 그리스시대 청동투구와 함께 역사적인 ‘일장기 말소사건’을 알리는 사진물이 게시돼 있다. 

일장기 말소사건은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 2면에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사진을 게재하면서 유니폼에 달린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올림픽 직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손 선생이 우승한 8월 9일부터 16일이 지난 25일, 일본 주간지 아사히 그라프에 실린 손 선생 시상대 사진을 수정해 신문에 게재했던 것이다. 이 사건의 중심인물은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로 알려져 있다. 사회부 체육주임으로 일하던 이길용 기자는 망국의 한을 일깨우기 위해 일장기를 지워버리기로 하고, 당시 삽화와 도안을 맡고 있던 이상백 화백과 함께 손 선생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독자들로부터 많은 환영과 지지를 받았지만 이길용 기자 등은 구속돼 영어의 몸이 됐으며, 신문이 발행됐던 이틀 후부터 9개월여간 무기정간을 당한 끝에 다음 해 6월 2일 복간을 알리는 호외를 낼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동아일보에 ‘조선야구사’를 연재하기도 했던 이길용 기자는 1945년 광복 뒤 동아일보에 복직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납북된 뒤 돌아오지 못했다.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고 한국 스포츠기자로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길용 기자의 업적을 기념하고 유지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이 지난 수십년간 펼쳐졌다. 이길용 기자의 3남 이태영씨는 아버지에 이어 체육기자로 지난 1950년대 말부터 40여년간 활동하며 서울올림픽 유치에 기여하는 등 한국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체육기자연맹은 1989년부터 매년 체육기자 1명을 선정해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정부는 1991년 이길용 기자에게 건국훈장 애서장을 추서했다.

체육기자 출신을 회원으로 한 사단법인 한국체육언론인회(회장 이종세)는 체육기자연맹(회장 정희돈)과 함께 일장기 말소사건 81년을 맞은 오는 25일 손기정기념관에서 이길용 기자 흉상 제막식 및 이길용 기자의 스포츠와 시대정신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종세 체육언론인회 회장은 “일찍이 앞선 시대정신을 갖고 나라의 독립의지와 진실을 밝히는 데 온 몸을 바친 이길용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뒤늦게나마 흉상을 마련하게 됐다”며 “시대의 암흑을 빛으로 밝힌 이길용 기자의 정신은 앞으로 한국 스포츠저널리즘의 귀감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견 조각가 이용철 작가가 만든 청동 흉상은 높이 90㎝, 가로 64㎝, 세로 35㎝로 실제 인물의 1.3∼1.4배 크기로 손기정 선생의 동상과 함께 기념관 내에 설치되게 된다. 광복일(8.15)과 국치일(8.29)이 공교롭게 같이 낀 8월, 나라를 잃고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의 인연으로 ‘한국인’의 의식을 일깨운 두 영웅, 손기정 선생과 이길용 기자의 역사적 삶을 다시 한번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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