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은 누각과 정자의 합친 말이다.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다락구조로 높게 지어진 누각과 경관이 수려하고 사방이 터진 곳에 지어진 정자는 자연 속에서 여러 명이 또는 혼자서 풍류를 즐기며 정신수양을 하던 건축물이다. 옛 선비들은 마음의 여유를 느끼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누정을 찾았다. 이곳에 담긴 선조들의 삶을 알아보자.

 

▲ 탑골공원 팔각정에 시민들이 앉아 있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학생대표 선언문 낭독 이어 울려퍼진 ‘대한민국 만세’
대한제국 때, 황실 음악연주소로 사용되기도 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 팔각정’은 3.1운동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사람이 만세 운동을 펼쳤던 팔각정. 이곳은 대한제국 초기, 공원으로 개방된 근대의 공간이다.

◆고려시대에 사찰 ‘흥복사’ 존재

14일 오후 시민들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피해 팔각정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평소 이곳은 어르신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이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역사적 장소였다는 것은 팔각정을 보며 떠올릴 뿐이었다.

처음부터 이곳에 팔각정이 있던 것은 아니다. 원래 이곳에는 고려시대에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1464년(세조 10)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했다. 이 공사를 위해 동원된 군사는 2100명이었고, 13인의 부장이 감독으로 임명됐다. 근처의 가옥 200여채를 철거해 3년 후에 완공된 사찰의 규모는 굉장했으며, 도성 안 제일의 대가람이었다. 이후 연산군 10년(1504) 12월에 폐사됐다.

그 이듬해에는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로 옮기고, 다시 ‘연방원(聯芳院)’으로 이름을 고쳐 기생방이 되기도 했다. 당시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 1200여명과 악사 1000명, 감독 40명이 기거하는 연산군의 기생방이 됐다.

연산군이 실각한 뒤 이 건물은 잠시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됐다. 중종 9년(1514)에 원각사의 재목을 공공건물의 건축에 쓰게 돼 그 자취가 완전히 없어졌다. 지금은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대원각사비만 남아 있다.

▲ 탑골공원 팔각정 전통 문양 ⓒ천지일보(뉴스천지)

◆황실 음악연주소로 활용

팔각정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 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었다. 단청은 모루 단청이며, 외진주열에는 각 면에 낙양을 설치하고 무궁화 당초로 장식했다. 머리초 사이의 계풍에는 소나무, 난초, 국화 등의 그림으로 장식해 일반적인 단청과는 달리 한국적인 정서가 강조된 분양들로 시대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전통과 근대의 건축 기술을 두루 사용했던 건축가 심의석이 주도해 공사를 진행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도편수 배희한이 건립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탑골공원은 서울에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이 공원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졌다. 이 공원은 조선 말 고종 때에 총세무사로 있던 영국인 브라운이 1896년 건의해만들었다고 한다. 탑동공원, 파고다공원으로 불리다가 1991년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됐다.

과거 황실 관현악단이 쓰던 황실 음악연주소였다고 한다. 당시 일요일에 한해 일반에게 공개돼 관현악을 듣고자 많은 시민이 모여들 했으며, 평일에도 일반에게 공개하기 시작한 것은 1913년 7월부터였다.

◆3.1 만세운동 외치던 곳

이 건물은 외관상의 비례가 훌륭해 남산팔각정의 모본이 되기도 했다. 팔각정과 탑골공원은 1919년 3월 1일 당시 청년학도와 애국시민이 이곳에 모여 학생대표의 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벌였던 3.1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다.

1969년 3월 발행 한국은행권 오십원 지폐 앞면에는 팔각정 모습이 국보 제2호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오늘날 팔각정은 어르신들의 휴식공간으로 각인되고 있다. 하지만 독립을 갈구했던 그 당시의 모습은 여전히 역사적 기록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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