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유비무환(有備則無患)’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준비가 철저하면 나중에 근심이 없다’는 말로 과거 박정희 대통령시대 많이 듣던 말이다. 관청마다 박 대통령이 쓴 휘호가 하나씩 걸려 있었으며 안보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이 말의 출전은 서경(書經)과 좌씨전(左氏傳)이다. 진나라에 사마위강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대외문제를 잘 처리해 왕이 아름다운 여자를 하사하려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편안할 때에 위기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대비를 하게 되며, 대비태세가 되어 있으면 근심이 사라지게 됩니다(有備則無患).”

요즈음 한반도를 둘러 싼 아시아의 긴장과 전쟁 위협으로 요즈음처럼 이 말이 와 닿는 시기도 없는 것 같다. 유비무환을 잘하지 않은 국가는 외국의 침공에 당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백제 개로왕이 5세기 말엽 한성(漢城)에서 고구려의 침공을 받고 왕이 죽음까지 당한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했고 첩자인 도림의 말에 현혹돼 바둑으로 소일했다.

백제 말 의자왕도 마찬가지였다. 국력을 믿고 전쟁 상대인 신라를 얕잡아 보았다. 충신인 성충이 옥에 갇히면서 왕에게 유비무환을 고언 했다. 

“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에 못 들어오게 한 뒤, 험한 지형에 의지해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의자왕은 안이한 생각으로 신라군이 일시에 탄현을 넘고 당나라군이 바다를 건너 기벌포에 상륙하는 것을 상정하지 못했다. 의자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신라 5만 대군이 험준한 탄현을 넘었던 것이다.

조선 임진전쟁은 대표적인 안보부재가 만든 비극이다. 이 시기 조선은 왜군의 침공을 반신반의 했다. 조정은 동인, 서인으로 갈라져 왜국 침공에 대한 시각이 상반됐다.

이 시기 율곡(栗谷) 이이는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선조에게 ‘10만양병설’을 주청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여러 이유를 들어 수용하지 않았다. 영상 류성룡도 불가함을 얘기해 결국 실현하지 못했다.

율곡의 10만양병설은 날조됐다는 주장도 있다. 일부 학자들이 선조실록에 기록되지 않고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율곡의 제자들이 주류를 이룬 서인(西人)들에 의해 기술된 것이므로 이를 믿지 못하겠다는 주장이다.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 갈 때 춘추관 사관들이 대부분 도망갔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집에 보존한 사초(史草)를 불태우거나 훼손시켰다. 전쟁이 끝나고 실록을 수습할 당시에는 기록이 없어 여러 중신들의 얘기나 행장을 참고한다.

율곡을 제일 많이 접한 제자는 바로 행장을 지은 사계(沙溪) 김장생이었다. 그가 율곡을 미화하기 위해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며, 당시 도승지와 요직을 맡았던 이항복, 영의정 유성룡이 지켜보면서 이를 증언한 것을 보면 10만양병설은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백사나 월사 이정구 등 당대 의기가 있었던 중신 학자들이 실록을 날조했다고는 생각 할 수 없다. 행장이나 신도비의 문구 하나도 사실이 아니면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던 조선 사류사회의 분위기를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조선의 운명을 가른 것은 바로 10만양병설을 흘려버린 것이다. 7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당한 수모와 문화유산의 침탈은 형언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이런 역사를 체험한 우리지만 지금은 그 교훈을 깡그리 잊고 있다.

지금 한반도의 불안한 정세를 정부나 국민들이 너무 낙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북한의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한 사드마저 국론 분열로 배치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어정쩡한 안보의식이 앞으로 얼마나 민족의 비극을 불러일으킬지 모르는 일이다. 정부는 시급하게 모든 일에 우선해 유비무환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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