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은 누각과 정자의 합친 말이다.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다락구조로 높게 지어진 누각과 경관이 수려하고 사방이 터진 곳에 지어진 정자는 자연 속에서 여러 명이 또는 혼자서 풍류를 즐기며 정신수양을 하던 건축물이다. 옛 선비들은 마음의 여유를 느끼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누정을 찾았다. 이곳에 담긴 선조들의 삶을 알아보자.

 

▲ 세검정터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시대에 창의문 밖 탕춘대 부근에 정자 하나가 있었다. ‘세검정(洗劍亭)’이었다. 세검정이 세워진 이곳은 도성의 서북쪽 밖 북한산과 북악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게 펼쳐진 곳이었다.

그 옛날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정자 하나를 떠올리며, 세검정을 찾아 갔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달랐다.

7일 서울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터. 푸르른 나무는 도심 밖으로 밀려났고, 정자는 도로 옆에 모습을 앙상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세검정도 다시 지어진 것이다. 그덕에 지금은 ‘세검정터’라고 불린다. 이곳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됐다.

◆속설 많은 세검정터

세검정에는 유래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먼저 세검정은 연산군 6~11년(1500~1505)경 유흥을 위한 수각(水閣: 물가에나 물 위에 지은 정각)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이야기는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주도세력의 일원이었던 이귀(李貴), 김류(金瑬) 등이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었다 하여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검(洗劍)이란 칼을 씻어서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또 영조 23년(1747)에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옮겨 경기 북부와 서울의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게 했다고 한다.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정자를 지었는데, 그것이 세검정인 것이다. 당시 총융청 감관으로 있던 김상채(金尙彩)가 지은 ‘창암집’에는 육각정자로 영조 23년에 지어졌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어느 게 진짜 세검정의 유래인지는 알 수 없다.

세검정은 책들에도 기록돼 있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세검정은 열조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洗草:사초를 물에 씻어 흐려 버림)했고,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한경지략’에는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됐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을 거슬러 올라 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했다. 그 밖에 세검정과 관련된 시로 정약용의 ‘유세검정(遊洗劍亭)’이 있다.

세검정의 옛 모습은 겸재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洗劍亭圖)’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림을 보면 기둥이 높직하게 서 있는 누각 형식의 건물로 도로 쪽을 향하는 면에는 나지막한 담을 돌렸다. 입구에는 일각문을 뒀다. 정자 측면으로는 편문을 두어 개울로 내려갈 수 있도록 했다.

또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물은 금방이라도 ‘콸콸’하고 소리 내는 듯 보인다. 이렇듯, 세검정은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에 놓여 있었다.

◆화재로 소실 후 복원

하지만 오늘날의 세검정은 그림 속의 모습과 달랐다. 소실됐던 것을 다시 복원했기 때문이다. 1941년 세검정 부근에 있던 종이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로인해 세검정도 불타고 주춧돌 하나만 남게 됐고, 이를 1977년 5월에 복원했다. 복원은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고했다고 한다.

복원 당시 도시계획선에 저촉돼 원위치에서 홍제천 상류로 약 40m 이전해 복원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원위치에 주초 자리가 드러나게 돼 도시계획선을 변경하고 원위치에 복원했다.

복원된 정자는 서남향 했는데,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가운데 칸이 넓고 양협칸이 좁아 정면은 3칸, 측면 1칸에, 개천 쪽 서남쪽으로 가운데 1칸을 내밀어 정(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암반 위에 높이가 다른 10개의 4각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건물 북쪽 협간에는 밖으로 계단을 설치해 도로에서 오르내리도록 했다. 기둥 사이에는 문을 설치하지 않고 개방했다. 또 겹처마, 팔각지붕으로 돼 있다.

현재 이 부근을 둘러보면 주택이 가득하다. 정자 옆에는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어 운치 있던 옛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나마 복원된 건물로, 옛 모습을 그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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