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시진핑(習近平)이 중국의 국가 주석이 되어 중국의 권력 서열 1위가 된 것이 2013년 3월이다. 그때 그는 소탈해 보이면서도 세월의 시련에 많이 찌든 인상을 풍겼었다. 얼굴에는 음영(陰影)이 드리워진 듯도 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밑바닥에서부터 몸을 일으켜 일당 독재의 철저한 위계(位階)를 뚫고 무사히 정점에 이르는 혹독한 과정이 사람을 녹초로 만들어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래서 얼굴에 묻어나는 표정으로만 보아서는 그는 퍽 온화하고 겸손하며 너그러운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짐작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웃나라와의 관계에서도 그런 부드러움이 전달돼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공산당 일당 독재 권력을 넘겨받은 지 4년차, 그는 벌써 많이 변한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집단지도체제의 구속에서는 이미 풀려난 느낌이며 점차 1인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皇帝)’로 변모해가는 것 같다. 그 스스로는 이를 알까 모를까. 그동안 그는 중국몽(中國夢)과 일대일로(一帶一路)의 통치 구호를 창안하고 내세워 ‘인민’을 효과적으로 이끌어왔다. 그런가 하면 부패척결이 누구도 부인 못할 중국의 시급한 시대적 과제라는 점을 ‘핑계’로 삼아 그의 정치행보에 돌부리가 될 만한 정적들을 어느 새 거의 다 쳐냈다. 그렇게 되기까지 적어도 공개적으로나 눈에 띄게는 아무도 그에게 제동을 거는 세력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시진핑이 이렇게 무섭게 변할 인물이라는 것을 미리 확실히 안 사람들이 드물었던 것 같다. 열 길 물 속보다 한 길 사람 속이 더 알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까 시진핑 권력이 슬금슬금 무섭게 강화되기도 했지만 설마가 사람 잡은 측면이 없지 않다. 이것이었다. 시진핑 권력의 칼날에 잘려나간 사람들로부터 허다하게 받은 느낌을 말한다. 즉 그것은 그 사람들이 넋 놓고 있다 허를 찔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으며 짐작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전통으로는 권력을 내놓고 떠난 ‘전임(前任) 권력’이라 해도 함부로 나대지는 못할지언정 아주 죽은 권력이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전임 주석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까지도 자신이 심어놓은 팔다리와 같은 인맥들이 잘려 나갈 때 큰소리로 뚝 부러지게 항변 한 번 제대로 했던 것 같지가 않다. 그렇게 대들다간 그들이 다칠 수 있다 생각했을까. 그럴 개연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처럼 그들이 허를 찔린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권력 시진핑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라면 곧 열릴 전직과 현직의 최고 권력 합동 모임인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를 통해 그 사실 여부를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베이다이허 회의는 장막을 두르고 이루어지며 결과를 발표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뒷날 차차 드러나는 징후들이 전·현직 실세들이 비교적 솔직하게 이 자리에서 터놓고 토론한 내용들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이렇게 언론과 시민 사회에 의해 견제를 받지 않는 권력은 비밀이 많을 수밖에 없다. 얼마든지 감출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그들의 정치는 한마디로 어둡다. 경제는 세계적인 추세를 흉내 내어 어쩔 수 없이 대외 개방을 지향해가면서도 정치는 도리어 퇴행(退行) 내지 역진(逆進) 현상을 보인다. 공산당 일당 독재의 유지를 위해 불가피하다. 왜 그런가. 그들은 일견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것에 의한 경제적 여유는 인민의 개인주의를 부추기고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념적 기율(紀律)을 느슨하게 해 당과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이완시키기 때문에 언론 통제와 강압이 동원된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공산당 일당 독재를 고집하는 한 치유가 불가능한 영속적인 병(病)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체제유지를 위해 경제가 인민을 풀어지게 하는 만큼 정치적 물리력으로 그것을 단속하고 조이려 한다. 바로 공산당과 1인 실세의 권력 강화를 통해서다. 그로써 나사(螺絲)로 조이듯 인민에 대한 통제력을 키운다. 이 얼마나 내부의 부조화와 모순을 키우는 일인가. 그럼에도 다양성의 사회가 아닌 일당 독재 체제의 속성상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여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다고 말하면 공산당의 말이 바로 여론이다. 다수의 의견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다수의 의견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다수의 의견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소수의견이라 해도 그들이 그렇다고 하면 다수 의견이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세계의 보편적 흐름에 비추어 기형적이며 괴물적이다. 그런 그들이기에 북의 핵미사일에 대항하는 우리의 불가피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배치에 대해 그렇게 적반하장(賊反荷杖)이고 옹졸하며 얼토당토 않은 시비를 걸어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우연한 논리가 아니라 필연적인 궤변임을 알 수 있다. 참으로 불편하고 거북한 이웃이다. 어떻게 세계가 한결같이 우려하는 북의 ICBM 발사를 규탄하기보다 바로 그 같은 도발 때문에 배치를 서두른 우리의 사드에 더 심한 태클(tackle)을 걸어올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들은 사드 배치를 철회하라며 경제보복을 가해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면서도 미국이 검토 중인 그들에 대한 ‘세컨더리 보이쿳(secondary boycott)’과 같은 경제 제재에 대해서는 북한 핵과 경제 문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냐며 항변한다. 귀에 붙였다 코에 붙였다 그들 맘대로다. 이중 잣대, 우리에게 하는 짓 따로, 강대국 미국에 하는 소리 따로다. 하긴 고통은 우리만 당하는 것이 아니다. 센카쿠 영토 분쟁 때문에 일본 역시 한때 희귀 광물 희토류 수입이 막혀 고통을 당했다. 경제적 약골인 몽골은 달라이라마를 초청했다가 중국이 국경 통관비를 부과하자 백기 투항했다. 또 중국에 호락호락하지 않는 차이잉원이 주석이 된 대만은 중국의 수출입통제와 관광 중단 조치로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유명을 달리한 류샤오보에 노벨상을 준다고 노르웨이에는 연어 수입 중지로 보복을 가했다. 그래서 시진핑의 중국은 주변국에 영락없는 골목 불량배 ‘불리(bully)’다. 오죽하면 미 국무장관 틸러슨이 외교적 결례를 불사하고 ‘좀 대국답게 행동하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군사 굴기(崛起)까지 달성하는 날, 이 ‘불리’의 행패는 과연 어떠할 것인가. 이 때문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불리’ 퇴치법이다. 그들의 겁박에 쫄지 않고 분열되지 않아야 하며 정면으로 맞설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외로운 처지도 아니다. 세계 최강의 미국과 동맹이며 일본이 우리의 우군이 돼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불리’에 맞설 우군을 넓히는 것은 얼마든지 더 가능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불리’가 악명을 떨치다 우리로부터 몰매 맞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빠져드는 것 아닌가. 그런데 쫄긴 왜 쫄아. 우리가 그들의 속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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