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일교수와 학생이 캠퍼스를 함께 걸었다. 교수는 학생에게 질문을 한다. 대학교엔 왜 들어왔니라고 말이다. 그러자 학생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재차 교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간 다음에는… 대답하기를 돈 벌어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라 한다. 교수는 또 묻는다. 그 다음에는… 그러자 학생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그렇게 살다가 죽겠지요”라는 답이다. 이 학생은 지금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수는 인생의 생(生)과 사(死)에 대해 적어도 고뇌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모른 채 길을 잃은 사슴같이, 또 자기 나름의 생각대로 어쩌면 방황하고 있는지 모른다. 즉,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또 그렇게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각자의 깨달음과 가치관은 하나의 당(黨)이 되고 나아가 세력이 되어 편파와 편견의 굴레를 만들어 서로 죽이고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같은 혼란은 종교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종교의 문제이기에, 세계 베스트셀러라고도 하고 종파를 떠나 누구나가 다 읽는다고 하는 성경(Bible)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무어라 하는지 알아보자.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며 인생을 떠나가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동안에는 인생의 수명이 천년이 다 되었으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라며 수명이 120년으로 한정되어질 것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생을 왜 떠나갔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하나님이 떠나간 것은 죄 때문이며, 그 죄는 언약을 어긴 결과다.

하나님의 생기(生氣) 즉, 생명의 말씀이 없이 흙과 다를 바 없던 인생 중에 한 사람을 택하고, 그와 “생명나무의 실과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언약을 했으나,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만다. 그 결과 죄와 함께할 수 없는 하나님은 인생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본이시다.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함께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떠나가니 곧 생명이 떠나간 것이다. 그리고 생명대신 사망이 들어와 왕 노릇하게 되니 우리의 수명은 120년이란 정함 속에 갇히고 만다. 그 정함마저도 원죄, 유전죄, 자범죄라는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급격히 줄어들어갔던 것이다.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는 말씀이 그 증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이 있듯이 하나님은 죄의 세상에서 죽어가는 인생들을 그냥 보고만 계셨을까. 그렇지 않음을 바로 이 성경과 성경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즉, 시대마다 펼쳐온 구속의 역사다. 노아의 세계, 아브라함의 세계다. 그러나 시대마다 하나님의 선민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내지 못했다. 결국 하나님은 한 몸을 예비했으니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다. 짐승의 피 대신 독생자 예수의 피를 통해서 인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완성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를 통한 구원의 역사는 영(靈, 요 4:24)이신 하나님이 아들 예수와 함께 일하신(요 10:30, 요 5:17) 초림의 역사와,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해 다시 오신다는 말씀처럼(요 14:2~3), 다시 오실 때는 영(고후 3:17)으로 오셔 한 사람을 택해(계 3:12) 그와 함께 재림의 역사를 펼치심으로 떠나셨던 하나님이 죄를 멸하고 새로워진 만물 가운데 드시게 되니(마 19:28, 계 21:1~5) 사망은 끝이 나고 영원한 생명이 주관하는 시대가 바로 이 땅에 펼쳐진다는 기막힌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 바로 죄 없는 세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요 천국이 된다.

그래서인지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했으며, 예수께선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즉, 하나님과의 약속은 “영원한 생명, 영생(요일 2:25)”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있다하나 그 종교의 참뜻은 그릇된 종교세상의 주관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왜곡과 오해로 점철되어 왔던 것이다. 예수께선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내가 가면 밤이 된다고 했다(요 9:4~5). 오늘 이 시대는 빛된 생명과 생명의 말씀이 없는 밤이요 어둠 곧 사망의 주관자들에 의한 악의 세상이었음을 그 누가 알았으랴.

이러한 문제는 종교의 문제이며 나아가 우리 인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각자의 종교를 통해 올바른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어야 함이 마땅하다.

필자는 여행 중에 어느 깊은 사찰의 스님에게 대화중에 질문을 하게 됐다. 왜 신앙 즉, 불가에 몸을 담았으며,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말이다. 그러자 스님은 ‘마음의 행복’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행복의 가르침을 받고자 전국에서 많은 불자들이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인가. 신학교는 예외 없이 돈을 받고 가짜 학위증을 발부해주는 가짜 공장이 되었고, 그 공장에서 찍혀 나온 가짜 지도자들의 가증스런 입담을 백성들은 좋게 여기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 같은 종교의 종말사상이 지배하는 이 시대는 이제는 끝이나줘야 하겠다. 종교의 목적은 마음의 행복도 아니요 온갖 가증스런 입담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나의 구원이요 나아가 인류의 구원임을 제발 깨닫자. 곧 생노병사의 굴레를 이기는 것이다.

다음호엔 동양선지서와 함께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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