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은 도시의 경계이면서, 도성민의 삶을 지켜온 울타리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도성의 기능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한양도성은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발굴과 복원과정을 거치면서 잃었던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와 관련, 한양도성 전 구간인 18.6㎞를 직접 걸으며 역사적 가치를 몸소 체험하고자 한다.

 

▲ 숭례문 ⓒ천지일보(뉴스천지)


백범광장~돈의문터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한양도성 성벽이 가장 많이 훼손된 구간은 어딜까. 바로 평지인 서울 중구 숭례문 구간이다. 남산회현자락으로 성벽이 길게 이어져 내려오지만, 숭례문(崇禮門)부터는 일부 성벽만 남고 단절됐다.

◆국보 제1호 ‘숭례문’

실제로 26일 찾은 서울 중구 숭례문은 도심 속에서 몸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넓은 차도사이에 있는 숭례문은 유일하게 이곳에 성벽이 있었다는 것을 대신 말해줬다.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정문이다.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었다. 위상에 걸맞게 도성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하게 현판이 세로 방향으로 쓰여 있다. 1396년(태조 5)에 짓기 시작해 1398년에 완공됐고, 1448년(세종 30), 1479년(성종 10), 1868년(고종 5)에 큰 개축이 있었다.

▲ 도심 속에 고립된 듯한 느낌의 숭례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이후 500년 동안 원형을 유지해 오다가 1907년 교통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명목 하에 양쪽 성벽이 헐리면서 도로 한가운데에 고립됐다. 당시 일제는 도로 확장과 전차 선로의 개설 등으로 문 양쪽의 성벽을 모두 훼철됐다. 2008년 방화로 문루가 훼손됐다가 2013년 복구됐다. 이때 좌우 성벽(83m)도 함께 복원됐다.

▲ 숭례문 앞 연못인 남지터 표지석 ⓒ천지일보(뉴스천지)

◆숭례문 앞에 있던 연못

숭례문에서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면 도로변에 ‘남지터’ 표지석이 있었다. 도성 숭례문 밖 바로 앞에 있던 ‘남지(南池)’라는 연못 터이다. 관악산의 강한 화기(火氣)에 노출돼 있는 경복궁을 보호하기 위해 나라에서 만든 큰 연못으로,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옛 지도를 보면 남대문(숭례문) 앞에 남지(南池), 서대문 북쪽에 서지(西池), 동대문 안쪽에 동지(東池)라는 연못이 표시돼 있는데, 모두 연꽃이 피는 연못이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 표지석 부근에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즉 하루에도 인파가 붐비는 곳이다. 하지만 표지석이 길 한쪽에 있어 글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지나치기 쉬워 보였다.

▲ 대한상공회의소 앞에 남은 성벽 ⓒ천지일보(뉴스천지)

◆흔적만 남은 한양도성 성벽

숭례문 구간에서 한양도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대한상공회의소 부근에 담장처럼 남아 있는 성벽 일부였다. 원래 이곳은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은 물론 체성(성벽)조차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훼손됐는데, 옛 성돌의 흔적 위로 새로 몇 단을 쌓아 올렸다.

자세히 보면 오늘날 만든 규격이 짜인 하얀 성돌 사이로 거무스름하게 색이 변해버린 동글동글한 성돌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조선시대에 쌓여진 성벽임을 알 수 있었다. 간신히 남은 성돌은 이곳의 역사를 대신 알려줬다.

이곳을 지나면 한양도성이 단절됐다. 그리고 그길 끝에는 ‘소덕문터’ 표지석이 있었다. 소덕문(昭義門)은 한양도성의 서남문으로 속칭 서소문(西小門)으로 불렸다. 처음 이름은 소덕문이었으나 1744년(영조 20)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개칭했다.

▲ 소덕문 표지석 ⓒ천지일보(뉴스천지)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 과정에서 헐려 지금은 소덕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그 모습이 전해지는데, 성보다 약간 높게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 하나를 내어 통로로 삼았으며, 석축 위 4면에 나지막한 벽돌담을 두르고 양옆에 출입문을 세워 문루로 드나들게 했다고 한다.

이곳부터는 한양도성 안내판을 따라 길을 찾아야했다. 소덕문터 옆에 큰 차도가 있어 직선 길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에 ‘ㄷ’자 방향으로 차도를 건넌 후 다시 성벽길을 따라갔다. 성벽조차 없는 한양도성길은 왠지 다른 구간과 달리 낯설었다. 

▲ 배재 공원 ⓒ천지일보(뉴스천지)

◆배재학당 등 근현대 역사적 장소

서울 중구 평안교회 앞에는 ‘수렛골’이라 적힌 표지석이 있었다. 과거 서소문동 서북쪽 전 배재고교 자리와 이화여고 부지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수렛골(현 순화동) 또는 차동(車洞)이라 불렀다. 그것은 이 마을에 숙박 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수렛골은 영조가 인현왕후 탄생지인 이 지역에 인현왕후 추모비를 세워 추모동이라고도 했다. 한양도성 표지판을 따라 길을 더 가면, 배재정동빌딩과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등이 나온다.

배재학당은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근대식중등 교육기관이다. 오늘날의 배재중학교·배재고등학교·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인근 배제공원에도 비석이 있었다.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곳 공원 부근은 1895년에는 독립협회가 이곳에서 태동한 장소이자, 독립신문도 발간한곳이다. 1897년 맨손체조를 비롯해 각종 구기운동이 처음 시작된 우리나라 체육의 산실이기도 하다. 

▲ 돈의문 터에 기록돼 있는 사라진 돈의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제 강점기 사라진 돈의문

배재공원을 지나 조금 더 길을 걸으면, 덕수궁 미술관 부근의 5거리 길이 나온다. 이 중 정동극장 방향으로 5분정도 길을 더 걸으니, 숭례문 구간의 마지막 장소인 돈의문 터가 나왔다.

돈의문은 한양도성 서쪽 문으로 흔히 ‘서대문’이라고 불렸다. 최초의 돈의문은 1396년(태조 5)에 도성의 8개 성문과 함께 건설됐으나, 1413년(태종 13)에 새로 지어진 서전문이 성문의 기능을 대신했다.

1422년(세종 4)에 다시 서전문을 닫고 이 지점에 새로 돈의문이 세워졌다. 이후 새로운 문이라는 뜻의 ‘새문’ ‘신문’이라고 불렸다.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돈의문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3월 도로 확장공사를 위해 철거됐다. 이처럼 한양도성 숭례문 구간은 조선 초 성벽이 쌓인 흔적과 근현대 역사가 함께 얽힌 장소였다. 

▲ 흔적도 없이 사리진 돈의문. 지금은 돈의문 터 표시만 적혀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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