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요란한 쓰르라미 소리가 더위의 절정을 알린다. 더위는 초복 중복을 지나 여름의 고개 마루인 말복을 향해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는 중이다. 여름도 더위에 헐떡이는 것 같다. 헐떡이지만 쉬지를 않는 것은 그것 역시 멈추지 않는 세월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더운 여름에도 바람에 쫓기는 구름처럼, 구름을 쫓고 모는 바람처럼 잘도 간다. 여름의 오르막 또는 내리막이라 해서 더 빨리 또는 더 느리게 달리는 법도 없다. 그저 정해진 속도대로만 달릴 뿐이다. 장대비가 오는 날에도 별이 총총 빛나는 밤에도 세월은 제 속도대로 간다.  

남태평양에는 물에 잠기는 섬들이 늘어간다. 화석연료를 태워 내뿜어진 이산화탄소로 지구가 더워져 북극과 남극의 거대한 빙하가 녹아내려 해수면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위도가 높은 지역의 기온도 점차 더워져서 열대와 아열대 지역의 식물들이 점차 그쪽으로 서식지를 확대해가고 있는 중이다. 걱정스런 변화다. 그럼에도 작년에 듣던 쓰르라미 소리를 또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후변화에 쫓기는 초조함에서만은 벗어나게 해주는 위안의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낮잠 자는 아이의 잠을 깨우더라도 쓰르라미 소리는 귀가 따가울수록 좋다. 결코 귀찮다 할 수가 없다. 여느 때처럼 그것이 힘차게 울어주어야 기후변화에도 여름이 아직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며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름이 건강해야 사람도, 또 사람의 일상도, 생명 있는 만물도 다 건강할 수 있지 않은가. 

매년 그렇긴 하지만 올 쓰르라미 소리 역시 날씨가 푹푹 찌던 어느 날 갑자기 우주를 탄생시킨 미립자의 대폭발 ‘빅뱅(The Big Bang)’처럼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폭발음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신기하게 여러 마리가 일제히 화음을 맞추어 그것들이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소리로 사람의 귀청을 때렸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더위가 심한 한낮, 그것도 하루 중 사람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혹서(酷暑)의 순간만을 틈 타 매일 습관적으로 울어댄다. 한 마리가 울면 모든 놈이 따라 울어 서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 안에 있는 놈들이라면 이내 울지 않는 놈이 없게 된다. 물론 비오는 날이나 구름이 잔뜩 낀 날, 맨 하늘에 뇌성번개가 이는 날, 바람이 시원히 부는 날은 아니다. 이런 날들은 쓰르라미들에게 놀기 좋은 날이 아닌 것 같다. 날개를 접어버리고 울지를 않는다. 쓰르라미들은 특별히 노는 무대를 가리지는 않는다. 공해가 심한 도심에서라도 잎이 무성하고 키가 높은 나무라면 그것들이 깃드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쓰르라미를 과연 하찮은 미물이라 무시할 수 있는가.

세월은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조용히 오고간다. 올해 또 듣는 쓰르라미 소리는 작년 이 맘 때의 것과 하등 달라진 것이 없이 귀에 익숙하고 강렬하다. 언제 반복해 들어도 그것은 그렇다. 귀에는 익숙하고 마음에 남기는 인상은 강렬한 것이 항상 놀라움이며 감동이다. 그 쓰르라미 소리 들은 지 벌써 1년, 또 한 돌을 맞는다. 이에서 새삼 깨닫는 것은 쉼 없이 가는 세월의 무상함이다. 그 세월이 벌써 뚜렷한 흔적도 없이 또 한 해의 절반을 주파했다는 사실이 허탈하다. 하늘을 휙 나는 비행체는 창공에 긴 비행운(飛行雲)을 남기고 파도를 가르는 배들의 스크류 회전은 뒤에 빠르고 기다란 소용들이 물살을 일으킨다. 세월은 그도 저도 아니어서 우리가 곤히 잠든 새, 쥐도 새도 모르게 바람처럼 왔다 사라지는 도둑과 같다 느껴진다. 더구나 세월이 오고 갈 때 개도 짖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세월이 소리 없이 가는 것은 맞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비롯한 뭇 생명들의 존재(being)의 시작과 성장과 생성(becoming), 사라짐(passing away)은 세월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명백한 흔적이다. 쓰르라미 역시 땅속의 유충에서 날개 달린 성충이 돼 특유의 고음으로 여름을 알리게 되기까지 그것을 길러내는 것이 세월 아닌가. 뿐만 아니라 세월이 가야 계절이 바뀌고 초목에 꽃이 피고 지며 작물이 자라 열매를 맺어 사람이 살고 자연이 건강하게 순환한다. 달도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며 어리고 커나가는 과정에 있어 미완(未完)인 유소년들도 세월이 갈 만큼 가야 어른이 되고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세월은 흐르지 않으면 안 되며 무상(無常)하다고 원망만을 들을 대상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만 당(唐)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권학시(勸學詩)’에서 읊었듯이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며 한창 시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것(歲月不待人 盛年不重來/세월부대인 성년부중래)’이므로 세월을 아껴 후회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세월이 베푸는 긍정적인 혜택과 결실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젊은이가 세월을 아끼고 세월을 재촉하는 노력을 펼치면서 성년(盛年)을 향해 갈 수만 있다면 세월 가는 것을 굳이 못마땅해 할 것도 없다. 그런 사람은 장래에 희망이 있고 노력의 결실이 장래의 어느 시점에 기다리고 있기에 오히려 세월이 빨리 안 가서 초조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어엿한 직장에 첫 출근 하는 날, 행복한 결혼,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꿈에 그리는 해후(邂逅)의 날을 앞에 두고 있는 경우 왜 세월 가는 것이 아깝기만 하겠는가. 하지만 인생이 이렇게 즐거운 날들이나, 기대에 부풀어 그런 날들을 기다리는 날들로 꽉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미색홍안(美色紅顔)을 뽐내거나 성취의 기쁨에 환호작약할 수 있는 날들이 사람에게 결코 길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부모 형제 친구 지인들과의 슬픈 이별도 세월이 만든다. 

사람은 태어나는 자리와 태어나게 하는 부모로 해서 천차만별이다. 태어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천복(天福)이지만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삶의 조건들은 절대적으로 평등하지가 않다. 천차만별로 태어남에도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며 불평등일 수 있다. 인생은 바로 이 같은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인 측면이 강하다. 지금까지 실증이 돼왔거니와 격차의 추격과 불평등의 극복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것에 인생의 묘미가 있으며 거기에 또한 인생의 살 만한 가치가 내재돼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직장과 짝을 못 구해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이여 용기를 내라. 더위가 가시면 쓰르라미 소리는 뚝 멎는다. 그걸로 쓰르라미의 일생은 끝이다. 인생은 쓰르라미가 아니다. 인생은 잠시지만 쓰르라미처럼 허망하게 인생의 노래를 멈출 수는 없다. 세월은 비행운과 같은 흔적을 남기는 것은 아니어도 그 세월 따라 사는 인생의 족적(足跡)은 불멸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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