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판사님! 용기내어 살고 싶어 목소리를 내고 자신을 드러낸 이 소녀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주세요” 한 교사가 연예기획사 대표에 의한 청소녀 성폭력 사건의 재상고심 재판부인 대법원 형사1부 판사들께 쓴 탄원서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사건은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여중생이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연예기획사 대표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임신, 출산에 이르게 되어 고소한 건이다. 1심 재판에서 12년형, 2심에서 9년형이 선고되었으나 대법원에서 무죄취지로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하여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고, 현재 재상고하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탄원서를 쓴 교사는 어제 오후, 교원대상 ‘성폭력예방교육 전문강사 기본과정’ 교육에서 만난 분이다. 나는 강의 도중 27살 나이차이가 나는 연계기획사대표가 여중생을 성폭력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전국 340개 여성·인권·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연예기획사 대표에 의한 청소녀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에서 작년 3월 말부터 매주 시민·NGO활동가·학자·법조인 등이 대법원에 릴레이 의견서를 보내는 운동을 하고 있다고 소개를 하며 선생님들의 동참을 요청했었다.

이 분은 한 여름 더위에 하루종일 교육을 받고 피곤하실 텐데 자정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탄원서를 썼을 뿐만 아니라, 중학교 2학년인 딸의 의견서까지 같이 보내주셨다. 같은 중학생으로서 피해자의 심정에 너무 공감한다는 말로 시작한 그 따님의 의견서에는 “만약 제가 피해자였다면 마음의 상처는 깊어만 가도 부모님께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피해를 끼칠까봐 쉽게 말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피해자가 가해자의 집에서 사는 생활도 지옥 같은 하루하루였을 것 같습니다. 만약 가해자의 집에서 사는 것이 조금이나마 괜찮았다면 아이를 출산하고 그 집에서 생활까지 하고 나서 굳이 다시 신고를 했을까요? 성폭행을 당한 직후에도 하지 않은 신고를 아이 출산까지 하고 나서 한 이유는 분명히 그 집에서의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씌여있었다. 그리고 피해자의 삶엔 아직도 많은 희망이 있고 밝은 미래가 있다며 다시 힘차게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판사님의 현명한 판결을 기대한다는 글이었다.

아침에 이메일을 열어보면서 세상을 바꾸는 ‘작은 실천’을 하신 선생님과 그 따님이 어젯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정경이 그려지면서 그분들이 피해자에게 보내는 따뜻한 응원의 마음들이 느껴졌다. 돌아보면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개소한 이래 지난 27년동안 수 많은 감동의 순간들이 있었다. 피해생존자분들이 용기 내어 ‘말하기’를 시작하고, 쉼터에 온 친족성폭력 피해를 입은 청소녀들이 다시 힘을 내어 학교생활을 하고 삶을 꾸려가는 모습. 그리고 성폭력은 6개월 이내에 고소해야한다는 친고죄에 묶여 고소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법제도를 바꾼 성폭력특별법 제정의 순간, 밀양집단성폭력사건의 수사경찰들이 피해자에게 주었던 2차 피해에 대한 국가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해 결국 국가책임을 인정한 대법원의 판례를 이끌어낸 일... 이러한 감동스런 순간이 가능했던 것은 수 많은 분들이 성폭력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명운동에 함께 해주시고, 이 교사처럼 시간과 마음을 내서 의견서를 써주시고, 또 단체에 매월 후원금을 내주신 덕택이다. 이러한 마음들이 모여 세상은 바뀌어 감을 새삼 깨닫고, 함께 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오늘도 반성폭력운동가로서 힘차게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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