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사무실에서 이배근 회장과 ‘물망초 프로젝트’ 5명 여고생은 기부금 전달 및 감사장 수여식을 가졌다. 이배근 협회장(가운데)과 물망초 프로젝트 5명의 학생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교육자 꿈꾸는 여고생들 ‘선행’
‘나를 잊지 마오’ 물망초 계획
학대 예방 위한 모금활동 펼쳐
피해아동 치유 교안도 만들어

[천지일보=손성환 기자] “죄 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그것은 우리의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든지 이 하늘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 보호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 선생이 1923년 3월 아동잡지 ‘어린이’의 창간호에 쓴 창간사의 일부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아동 보호 운동을 시작했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는 아동을 보호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다.

지난 2015년 말 인천 초등학생에 대한 감금·학대 사건이 있었고 지난해 초 평택 아동 학대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일들을 쉽게 잊어버리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는 데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교육자를 꿈꾸는 인천 연수여자고등학교 학생 5명은 동아리 ‘물망초 프로젝트’를 만들어 아동 학대 피해를 막기 위한 활동에 나섰다. 이들 여고생들은 피해자 아동들을 돕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고민했다. 아이들의 아픔도 잊지 말자고 호소했다.

여고생 5인방은 손수 만든 배지를 판매해 수익금 약 560만원을 모았고 제작비와 배송비 등을 제외한 전체 금액 300여만원을 모두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에 기부했다. 기부금을 받은 협회는 지난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협회사무실에서 ‘물망초 프로젝트’ 5명 여고생들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이곳에서 5인방을 직접 만나 그간 활동들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 지난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사무실에서 ‘물망초 프로젝트’ 5명 여고생의 기부금 전달과 협회의 감사장 수여가 있었다. (왼쪽부터) 협회 이경원 부회장, 연수여고 최지원, 박상아 학생, 협회 이배근 협회장, 연수여고 이지민, 이다은, 박소연 학생, 협회 강동욱 이사(동국대 법대 교수) ⓒ천지일보(뉴스천지)

◆여고생 5인방, 아동 위해 뭉쳤다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이배근 회장은 “이번에 고등학교 학생들이 스스로 모금을 해서 보낸다는 일이 자다가도 일어날 정도로 역사적인 일을 했다”고 칭찬했다. 1989년 3월 24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울 을지로에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가 만들어졌다. 이배근 회장은 당시 사무국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협회는 2000년대에 들어서는 정부의 경제적 지원 없이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세미나와 교육을 해오고 있다.

아동학대 예방 활동은 20여년이 넘었지만 국민들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한창 학업에 바쁜 고등학생들이 나서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수줍은 듯이 웃으며 협회 사무실을 방문한 학생들은 이번 활동에 대해 자신감 있고 진지하게 설명해나갔다.

‘물망초 프로젝트’ 동아리의 부장을 맡은 최지원 학생은 “물망초 배지를 만들어 판매했는데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요’다. 아동학대 사건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쉽게 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잊지 말자는 취지로 배지를 만들어서 알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최지원 학생은 “인터넷을 보다가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아이가 (감금과 학대를 받다가) 맨발로 탈출한 것을 봤는데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모르고 지냈다는 게 충격이 컸다”며 “교육계통으로 꿈을 가진 5명의 친구들이 모여 아동학대 예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꿈과 무관하지 않은 활동이 힘을 더했다.

5인방의 활동은 학대 받은 아이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이지민 학생은 “지금의 교육 체계가 아이들에게 ‘무조건 말을 들어라’라는 식으로 하다보니까 폭력적인 성향이 나오는 것 같다”며 “양방향의 소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정폭력 피해 아동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도 기획했다”고 말했다.

▲ ‘물망초 프로젝트’의 배지. (오른쪽부터)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요’다. 아동학대 피해자들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또 다른 배지는 항상 웃는 모습을 한 호주에 사는 동물 ‘쿼카’가 사람에게 물망초를 주는 모습이다. 가정폭력으로 상처받은 아동들이 쿼카처럼 항상 밝게 웃으며 살길 바라며 제작됐다. (제공: 물망초 프로젝트)

◆피해아동 위한 교육안도 직접 만들어

5명의 학생들은 5~7세의 가정폭력 피해 아동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계획서를 직접 만들었다. 이는 ‘상황인식하기-감정표현하기-긍정마인드-친구와 협동하기-꿈 찾아주기’ 등 5단계로 이뤄졌다. 각자 한 단계씩 맡아 수업을 구상했고, 학교 선생님께 자문을 구하거나 인터넷에서 심리상담 자료 등을 찾아서 만들었다. 전문가 못지않은 깊이 있는 고민의 흔적이다.

고등학생들이 모금 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최지원 학생은 “크라우드 펀딩(대중 모금)이라는 평소에 미술에 관심이 있어서 많이 찾아봤던 사이트에서 일반인들의 후원을 받아 배지 제작비용을 모을 수 있었다”고 답했다.

이어 박상아 학생은 “사람들이 홍보도 해주면서 기분 좋게 활동할 수 있었다”면서 “가정에서 맞벌이 부모들도 많고 아이들이 소외되는 경우도 많다. 이들을 위한 실질적인 도움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교육과 예방을 위한 모금을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주변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박소연 학생은 “주변 친구들이 아동 학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경우를 거의 못봤다”면서 “우리가 동아리를 만들고 배지를 만들고 하니까 ‘너희 뭐 해’ 하면서 친구들이 관심을 가져줬고 동참해줬다”고 말했다.

어려움은 없었을까. 이다은 학생은 “저희가 하는 활동은 사후 처방적인 활동이어서 가정 폭력을 예방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와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면서 “나중에 크면 그런 예방 활동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답했다.

응원의 메시지도 끊이지 않았다. 이다은 학생은 “프로그램 진행 중에 옛날 가정폭력을 당했던 분이 큰 힘이 됐다고 하면서 메시지를 보내주셨는데 그 말에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메시지 중에서는 ‘학생들이 가정폭력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줘서 고맙고 기특하다’ ‘지금처럼 아름다운 손길로 살아가길 바란다. 아동폭력이 빨리 사라지길 바란다’ 등이 있다.

▲ 이배근 협회장(오른쪽)이 인천 연수여고 물망초 프로젝트 동아리 부장 최지원 학생에게 감사장을 전달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협회 “피땀흘린 기부에 감사… 국가적 관심 필요해”

연수여고 물망초 프로젝트 5명의 학생들은 아동학대 예방을 위해 후원할 곳을 찾다가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를 알게 됐다. 협회에 메일을 보내 활동 기부 의사를 밝혔을 때, 협회에서는 학생들의 기특한 마음에 기부행사를 마련하고 감사장과 표창장까지 준비했다.

이배근 협회장은 “학생들이 손수 모금 운동을 한 것은 ‘블러드머니(피·땀 흘린 돈)’라고 할 정도로 너무 소중하다”면서 “상처받은 아이들이 정서치료라든지, 문화체험 등이 필요한데 학생들이 준 기부금을 그런 활동을 위한 지원에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아이들이 우울하고 부모로부터 매 맞고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룹홈(집단가정)이라고 해서 학대받는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 우리나라 전국 18곳이 있다”면서 “우리 협회가 울산에 7명 아이들에게 200만원을 보냈더니 생애 처음으로 2박 3일로 제주도를 갔다고 한다. 우울했던 아이들이 제주도를 다녀온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자기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회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여러분이 보낸 것을 그런 아이들을 위해 소중히 쓰겠다”고 답했다.

이 회장은 또한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5년 우리나라 전국에서 1만 1715건의 아동 학대 사례가 발생했다. 여기에는 교수나 의사 등 지식인이냐 아니냐 또는 빈부 격차를 떠나서 다양한 계층이 아동학대 범죄에 포함됐다.

이 회장은 “협회에서는 지난해 부모 4300명을 대상으로 아동 학대 예방 활동을 펼쳤다”면서 “이번에 기부활동을 한 여고생들이 대학에 가서도 이런 활동에 관심을 가져주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전파도 하고 협회가 어떻게 일하는지 지켜봐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아울러 호주나 영국에서처럼 우리나라도 국가적으로 아동학대 예방 캠페인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노르웨이의 한 아동학자가 미래를 위해서는 아동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캠페인을 벌인 게 1921년인데 우리나라는 1922년에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아동 보호 운동을 펼친 나라”라며 “옛날부터 있었던 아동 보호라는 좋은 전통을 깨뜨리지 말고 국민 전체가 실천할 수 있도록 해서 이어간다면 아동 학대나 가정폭력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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