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 주둔하던 미8군이 최근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용산미군기지 부지에 국가공원으로 조성될 용산 공원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크다. 미군이 남겨놓은 환경오염문제, 잔류시설로 인한 ‘반쪽 반환’ 논란 등 부지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짚어본다. 또한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외국 군이 주둔하게 된 용산의 역사와 배경, 당시 주민들의 삶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이 용산기지에 얽힌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천지일보(뉴스천지)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 주둔
일제, 기지 건설… 해방후 미군 인수
둔지미 마을 원주민 2차례 이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일제의 용산군용지 수용 관련 문건이 111년 만에 공개됐다. 이는 1906년 일본군이 용산기지를 조성하기 전에 작성한 문서다.

용산기지가 조성되면서 원주민은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해방 후에는 미군이 용산기지를 인수했다. 이처럼 용산은 군사지역, 특히 외국군 주둔지라는 역사적 아픔과 맞물린 특수성을 지녔다. 이와 관련, 외세의 침탈과 용산기지, 그리고 원주민의 뼈아픈 이주 과정을 들여다봤다.

◆산 모양, 용 닮아 ‘용산’

용산의 옛 이름은 ‘한강 유역의 기름진 평원’이라는 뜻의 부원현(富原縣)이었다. 용산이라는 지명은 한강변을 향해 구불구불 뻗어 나간 남산의 산줄기가 용이 몸을 비틀어 나가 머리를 쳐든 형상과 같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기름진 땅을 용이 삼키기라도 하듯, 용산은 외세가 침탈한 기구한 운명을 지닌 곳이었다. 실제로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고, 러일전쟁부터 해방까지는 일본군이,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조선 초 용산지역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한성부 도성으로부터 4㎞(10리) 이내의 지역)에 속했다. 조선 후기에 용산은 원효로 일대의 용산방과 후암·이태원·서빙고동 일대의 둔지방 등으로 구분돼 있었다.

◆일제, 식민지화 위한 용산기지 건립

일제는 용산을 군사적 요충지로 여겼고, 이곳에 용산기지를 만들었다. 용산기지는 오늘날 대한민국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용산 미군기지 일대 전체를 포함한 약 118만평 규모였다. 원래 300만평으로 조성하려 했으나, 원주민의 집단적 반발로 규모가 줄어들었다.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의 ‘일제시기 용산기지 구축 과정과 기지 내 주요부대 및 군건축물에 관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용산기지 공사는 크게 1, 2차로 구분됐다.

1906년부터 1913년까지 8년간 1차 기지공사가 실시됐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전후로 도성 내 주요 지점에 분산 주둔해왔던 일본군 부대들을 1908년 10월 용산기지가 완성되자 대부분 이전시켰다. 동시에 식민통치시설을 위한 입지를 제공했다.

도로, 전기, 전차 등의 도시기반시설도 구축했다. 이어 조선총독부는 1914년 행정구역을 전면 개편하고 군사적 목적에서 새롭게 조성한 용산을 경성부에 포함시켰다.

2차 기지공사는 1915년부터 1922년까지 실시됐다. 식민 지배의 공고화와 대륙침략의 전진기지 내지는 후방기지 구축을 목적으로 실시됐다. 이 과정에서 조선 내 2개 사단 증설(한반도 내 일본군의 상주군화)이 진행됐다. 기지 내 장병들을 위한 수많은 군 관사들이 신·증축됐다.

▲ 1906년 한국용산 군용수용지 명세도(용산공원조성구역라인 표시) (제공: 용산구)ⓒ천지일보(뉴스천지)

◆삶의 터전서 쫓겨난 원주민

용산기지가 설립되는 과정에서 용산원주민은 삶의 터전을 빼앗겨야만 했다. 오문선 서울특별시청 학예연구사의 ‘근현대시기 용산 둔지미와 둔지미 부군당의 추이’ 자료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둔지미 마을이 강제 수용돼 주민이 두 차례나 이전당했다.

먼저 1908년 일본 군용철도의 부설로 강제수용된 둔지미 주민은 현 용산 시민공원 일대로 이주했다. 1916년 둔지미 주민은 또다시 강제수용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당시 일제가 조선의 치안을 장악한 후 러시아와 대륙에서의 식민지 경영을 위한 주차군 체제를 지역방위를 전담하는 주둔군 체제로 전환했다. 이러한 전략적 변화로 19사단과 20사단이 편성됐고, 20사단사령부와 조선군사령부가 용산기지에 신설됐다.

이미 한 차례 강제수용과 이전을 당했던 둔지미 주민은 새로 정착한 곳에 10년도 살지 못하고 일본군 20사단의 편성으로 또다시 수용돼야만 했다. 그 결과 둔지미 주민은 오늘날 용산구 보광동에 집단이주했다. 둔지미 주민이 정착한 보광동일대에는 ‘신보광동’이라는 새로운 지명이 생겨났다. 

이태원 마을 일부도 용산기지에 수용됐다. 김천수 실장은 “이태원과 둔지미 마을에 가난한 사람이 많이 살았다”며 “특히 이태원은 1925년 기준으로 400~500가구가 조성된 큰 마을이었다. 이태원 마을의 옛위치는 경리단길”이라고 전했다

해방 이후 용산기지는 미군이 차지했는데, 이와 관련해 김 실장은 외세가 여전히 용산기지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둔지산(屯芝山)’의 존재가 잊혔다고 언급했다.

그는 “둔지산은 남산에서 이어오는 줄기”라며 “하늘에 제사 지내던 ‘단(壇)’이 있던 매우 중요한 장소”라고 말했다. 하지만 용산기지로 인해 역사와 전통이 단절된 상태며, 기지 반환 시 역사·문화적인 맥락으로 이 공간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세 침탈로 생겨난 지명

한편 외세 침탈로 지명이 생겨나기도 했다. 먼저 ‘이태원(異胎院)’이 있다. 조선 중기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 문헌에 따르면, 선조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운종사라는 절에 머물며 여승을 겁탈해 다른 씨앗이 잉태됐다고 속되게 불렀다고 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됐다.

‘남영동’은 일제 침략세력이 들어오면서 부근에 연병장이 설치되고 일제식 동명 ‘연병정(練兵町)’이 생긴 것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연병정이 남영동으로 개칭된 것은 1946년 10월이다.

‘동자동’도 있다. 1914년 경성부의 구역 및 명칭 변경 시 일본식 지명인 고시정(古市町)이 됐다. 고시정이란 명칭은 경부선을 설계했던 일본인 토목건축가인 ‘고시공위’의 성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1946년 일제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중구 동자동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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