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성춘 변호사가 지난 4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조세 전문가로 인정받기까지 겪었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세 전문 고성춘 변호사

절에서 고시 준비하며 깨달음
남과 비교하는 것 그만두고
합격을 의식하지 않기로

감사원에서 금융감사 하다
국세청 개방직 1호 특채돼
법무과장 자리 5번 연임

국세청에서 구제시스템 완비
수필·조세책 등 다수 책 집필
“얼떨결에 간 길… 인연법”

[천지일보=차은경 기자] 세금은 우리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오죽하면 ‘태어나면서 따라다니는 세금은 죽어서도 따라간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고성춘 변호사는 이러한 세금을 다루는 조세전문 변호사다. 그는 5년간 5만여건이 넘는 소송을 다룬 조세 사건의 달인이다. 감사원에 최초로 들어가 금융 감사를 하고, 서울지방 국세청 개방직 1호로 특채돼 법무과장을 5번이나 연임했다.

고 변호사는 작가이기도 하다. 지난 2002년 첫 수필을 내고, 국세청에서 나오자마자 2008년 한 해 동안 조세법 사례연구 시리즈를 완성하기 위해 곧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지난 14년간 집필한 책만 해도 12권이다.

앞으로 어느 변호사도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국세청에 몸을 담기도 어려울뿐더러 그 어려운 조세 관련 책을 사례집으로 써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지만, 열정과 신념으로 똘똘 뭉친 고 변호사는 그 일들을 해냈다.

변호사로 불리기보다는 작가로 불리길 더 좋아한다는 고 변호사는 사실 조세 전문가로, 작가로 인정을 받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견뎌야만 했다. 최근 사무실에서 만난 고 변호사는 “모든 것이 값진 실패였다”고 말했다.

고 변호사는 1985년 첫 도전에 나섰던 사법시험 1차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12년 동안 18번의 사법시험을 본 후에야 사시에 합격했다.

“20대 초반에 사시 공부를 시작해서 30대 초반까지 했어요. 처음에는 당연히 된다 생각했는데 안돼서 실망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못나도 내 인생이고 잘나도 내 인생인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 현실을 인정하게 됐어요.”

▲ 고성춘 변호사가 지난 4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조세 전문가로 인정받기까지 겪었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그러면서 고 변호사는 자연스레 남과 비교하는 것을 그만두게 됐다. 하지만 또다시 의문이 들었다. 인생이 자꾸 꼬이기만 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같이 고시 공부를 하던 친구의 전화로 용주사로 들어가게 됐다. 이 계기로 절에서 생활하며 고시공부를 했다. 이렇게 시작된 불교와의 인연은 고 변호사 인생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됐다.

그러다 형이 있는 뉴질랜드로 고시 공부를 하러 가게 됐다. 그때 골프를 배우는 과정에서 그가 공을 잘 치지 못하자 공을 의식하지 말라는 형의 외침을 듣게 됐다. 그때야 그는 ‘아 내가 고시가 안 된 게 합격을 너무 의식 했구나’라고 깨닫게 됐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고 했던가. 겪었던 모든 실패는 다 피가 되고 살이 됐다. 고 변호사는 이후 사시를 통과하고 감사원을 가게 됐다. 1년 3개월이나 했을까. 다시 그는 ‘내가 여기 있을 데가 아니다’라며 대책 없이 감사원에서 나왔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났다. 가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절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아이가 기어 다니는 것을 보자 아이를 위해 글을 적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고생을 많이 하는 데 그걸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로서의 존재를 남기기 위해 글을 썼다. 처음에는 집사람이 “이것도 글이냐”고 했지만, 인내를 갖고 200번 정도 다듬어 책으로 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첫 수필 ‘값진 실패 소중한 발견’이다.

그러다 이 책을 본 사람이 고 변호사를 국세청에 맞는 사람이라며 추천했고, 법무과장 자리를 5년간 하게 됐다. 고 변호사는 항상 직원에게 “우리가 복전을 이루는 것 아니냐. 얼마나 좋냐. 억울하다고 하면 말 들어주고 내가 억울한 일 안 생기게 해줄 수 있고. 일하면서 복 쌓는 게 얼마나 좋냐”고 말했다.

그는 “법무과장을 하며 할 일이 많았다. 사람들이 ‘너는 어디서 그렇게 아이디어가 나냐’고 물었다”며 “그런데 나는 보면 보이던데 왜 안 보일까”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구제 마인드’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법무과장을 하며 구제시스템 쪽은 거의 완비했다”고 자부했다. 그렇지만 법무과에서 구제만 한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그는 “골드바 이런 것으로 몇조를 환급해 먹고 한 사람들을 다 잡았다”며 “청장한테 건의해 조사국을 동원하고, 국세청 차원에서 안 되니 검찰까지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조세 관련법서가 없었다. 세법이 법인데도 학문이 아니라는 비웃음을 받고 있고, 법서다운 법서 하나가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고 변호사는 국세기본법 사례연구를 시작으로 조세법 상권과 하권, 상속세 및 증여세법 사례연구를 집필하는 데 전념했다.

국세청에서 나와 돈을 벌어야 할 때 절에 가 책을 쓰고 있는 모습을 남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절에 들어가 고시 공부를 하며 보이는 이 세계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연장선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퇴직금으로 책을 만들고 장모님께 생활비를 꿨다.

고 변호사는 “감사원에 들어가 금융감사를 한 사람도, 국세청에 들어가 법무과장 자리를 맡은 사람도, 조세 사례집 책을 적은 사람도 내가 최초였다”며 “그러나 모두 얼떨결에 간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것이 지나고 보니 다 인연법대로 된 것”이라고 했다.

“난 왜 이렇게 고시가 안돼서 힘들지 했는데 부처님이 저를 엄청 사랑하셨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이걸 젊었을 때 안 겪었으면 나이 들어서 겪어야 할 부분인데 젊을 때 고생을 농축해서 한 번에 준거죠. ‘젊어서 고생하라는 말이 그 말이구나’ 했어요. 젊었을 땐 고통이 고통처럼 안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제가 자꾸 실패가 실패라고 생각하고 힘들어했는데 사실은 소중함을 발견했다 이거죠. 그래서 값진 실패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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