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그린 위에 태극기가 반짝반짝 빛났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스포츠를 아끼는 전 세계인이 숨죽이고 바라보는 가운데 아마추어 선수이자 국가대표인 최혜진(18)의 모자에 씌어진 ‘KOREA’라는 글씨가 거의 4시간 내내 TV중계화면에 비쳐졌다. 가슴을 벅차게 한 한국낭자군 데이(Day), 코리아의 날이었다.

여자골프 최고 권위의 US여자오픈에서 당당히 우승한 박성현, 2위 최혜진, 공동3위 유소연·허미정, 공동5위 이정은, 공동8위 김세영·양희영·이미림. 대회 마지막날 트럼프의 기립박수까지 받은 ‘닥공’ ‘남달라’ 박성현은 지난해 실패가 올해 성공을 위한 교두보가 됐다. 라운드 직전 “후반 롱홀에서 기회가 올 것이므로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자세로 임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우승예감이 들었다. 한 때 단독선두를 달린 최혜진은 공격적인 플레이로만 일관하다 파3홀에서 티샷을 물에 빠뜨리며 스스로 무너졌다. 공동선두를 지키다 ‘때’가 되면 도모하겠다며 16번홀 그린 한가운데를 겨냥했더라면 우승 기회를 그리 허무하게 놓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청라CC 한국오픈에서 필자는 우연히 최혜진의 부모를 만난 적이 있다. 부모가 기울인 남다른 딸 뒷바라지에 관한 얘기도 들은 필자여서 남다른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기에 더욱 아쉬웠고.

여자골프가 국력의 전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전 지구촌이 알아줄 만큼 일취월장한 한국 국력의 현주소를 미국이,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 소유의 골프장에서라도 좀 지켜보며 눈치 채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만 열면 한미FTA 재협상 문제를 꺼내는 트럼프. 그는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데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지지하며 인도주의적 사안 등과 관련한 남북 대화를 재개하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열망을 지지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의 남북 군사회담 및 적십자회담 제의와 관련해 “현재 상황과 명백하게 멀리 떨어져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우리 내부 일각에서도 “남북관계 개선은 모색하되 조급하게 굴어선 안 된다”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다”거나 심지어 “북한이 요구하는 조건을 안고 대화로 간다면 대한민국으로서는 망하는 길”이라는 극언이 나오고 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얘기해 보자. 필자는 서희 하공진 장군 등의 목숨을 건 애국심과 희생정신, 세계외교교섭사에 길이 남을 지략 빛나는 외교담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힘을 바탕으로 해야 외교력도 있다. 하지만 강감찬의 귀주대첩만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했다고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 정부 출범 후 겨우 두 달여. 그런데도 잦은 인사 난맥과 제멋대로식 일부 경제시책 등에서 헛발질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안타까운 비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따져 묻고 싶은 것이 많다. 소통·공감의 정치가 아니라 혹시라도 ‘쇼통’이나 일방독주식 통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은 없는가.

문 대통령은 운동권 출신 청와대 참모들에 대한 국민 불안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한 때 주사파였던 측근은 왜 당시 행적에 대해 공식 사과 한마디도 없이 청와대 비서실장 등 중책을 맡고 있는가. 무거운 직·간접 납세에 허리가 휘고, 갑(甲)질 횡포에 멍든 서민들의 어려움을, 상대적 박탈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고 생각하는가.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전가의 보도인가. 어려운 경기를 얼마나 알며 중소기업을 최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정책을 펴긴 펴고 있는가. 신규 고용을 유도한다면서도 정부 재정에서 3조원 이상을 지원해가며 최저임금을 확 올려야 하는가. 정규직은 무조건 옳고 비정규직은 무조건 그르다는 생각에 공공부문 정규직을 제로로 하겠다고 밝힌 것인가. 탈 원전, 4대강 보 개방 등과 같은 획기적인 조치에 여론수렴 절차나 국회협의는 왜 안 거쳤는가. 대선공약 이행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은 분권형 개헌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망국적인 제왕적 대통령제를 혁파해낼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닌지.

남북대화는 10.4공동선언 10주년이 되는 추석날에 맞춰 무슨 성과를 내려고 하거나 만에 하나라도 국내 정치상황을 덮고 호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살아생전 혈육을 만나보겠다는 이산가족들의 상봉염원은 시급한 현안이다. 과거 서해에서의 불행한 남북한 충돌은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중단 등으로 북한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군사분계선상 교전 발생 때 확전을 방지하는 매커니즘 차원에서도 대화채널 복원은 한 시가 급하다. 나아가 신(新)베를린선언에서 밝힌 남북긴장 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위해서나 침체일로의 우리 경제에 돌파구를 마련하고 북한 사회에 자유의 공기가 전해지게 하기 위해서도 불요불급하다. 시급한 남북대화를 누가 조급하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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