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 강릉시 초당동에 위치한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기념관 입구 모습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경포호수와 솔밭 어우러진 경치
허씨 5문장, 뛰어난 작품성 감상
이상사회를 추구했으나 좌절 ‘허균’
천재성 꽃피우지 못하고 요절 ‘허난설헌’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강원 강릉시 경포대 인근에는 조선시대 이름난 이들의 생가가 몰려 있다. 먼저 조선초기 세종 때 학자이자 생육신 중의 한 명인 김시습, 오늘날 훌륭한 어머니상의 대표인 신사임당과 조선중기 최고의 유학자로 꼽히는 율곡이이. 그리고 조선중기 개혁을 꿈꾼 사상가 허균과 천재적인 문학가이자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허초희)이다.

경포대 인근에는 신사임당의 친정집이자 그의 아들 율곡이이가 태어난 집인 오죽헌과 김시습기념관, 그리고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이 있다. 경포대 입구를 들어서기 전 동해대로 옆으로 오죽헌이 있고, 경포호수를 끼고 경포대를 가기 전에 있는 해운정 부근에 김시습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경포호수 건너편 초당동에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이 있다. 이곳 초당동은 이들 오누이의 부친인 허엽의 호인 ‘초당’을 따서 붙여진 것으로 알려졌다.

▲ 초희전통차 체험관 전경 (제공: 강릉시) ⓒ천지일보(뉴스천지)
▲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앞에 벚꽃이 핀 모습 (제공: 강릉시) ⓒ천지일보(뉴스천지)

초당순두부촌을 지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은 입구로 들어서면 기념관과 초희전통차 체험관이 있고 그 뒤로 생가와 솔밭이 있다. 고풍의 기와집 생가를 둘러싸고 있는 토담과 주변솔밭이 조화를 이룬 생가터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명당으로 잘 알려졌다. 특히 생가터 주변으로 벚꽃이 만개했을 때는 일품이다. 기념공원 옆으로는 생태습지가 있어 주말에 와서 둘러보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더구나 기념관과 생가터 관람은 무료라 부담이 없다. 해설사도 상시 운영하고 있어 허균(1569~1618)과 허난설헌(1563~1589)에 얽힌 일화도 들을 수가 있다.

▲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내부 전시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기념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매주 월요일이 휴관이다. 기념관에는 두 오누이의 사상과 문학성을 엿볼 수 있도록 영상자료와 함께 문학작품이 전시됐다. 아울러 당대 뛰어난 시재와 문재를 발휘했던 ‘허씨 5문장’도 소개돼 있다. 허씨 5문장은 그의 아버지 허엽(1517~1580)을 비롯해 그의 자녀들인 허성(1548~1612), 허봉(1551~1588), 허초희, 허균 4남매를 말한다.

허균은 허씨 5문장가에 대해 한 명씩 소개했는데, 부친 허엽에 대해 ‘우리 선대부의 문장과 학문과 절행(節行)은 사림에서 추중(推重)했다’고 칭송했다. 맏형인 허성에 대해서는 ‘백형이 경전을 전해 받았고 문장도 또한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었다’고 평했고, 둘째형인 허봉은 ‘중형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고고해서 근대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고 극찬했다. 바로 위 누이인 허초희에 대해서는 ‘자씨(姊氏)의 시는 깨끗하고 장하며, 높고 고와서 명망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진신사부가 모두 칭찬한다’고 말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나는 비록 불초하나 또한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문예를 담론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들어가고 중국 사람에게서 제법 칭찬을 받는다’라고 말해 겸손하면서도 절제된 자찬을 한다.

허균과 허초희가 중국에 잘 알려지게 된 것은 허균이 중국의 사신을 맡는 외교관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다. 허균은 특히 허초희의 빼어난 문학성을 그들에게 자랑하다보니 허초희는 중국과 일본에서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을 정도로 탁월한 감각을 지녔고, 그가 한류스타의 원조인 셈이다. 이들 5문장의 시 한편씩을 감상하려면 야외 공원에 세워져 있는 5개의 비석을 가보면 된다. 비석 한 개마다 이들 한 명씩의 시가 한글과 한자로 새겨져 있다. 이들은 강릉 초당에서 살면서 경포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시를 읊고 문학성을 키워나갔다.

▲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내 허씨5문장의 비석이 있다. 허씨가문 5명의 시가 1편씩 적혀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알려진 바로는 허균은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탓에 고위관직에 있을 때도 남들의 미움을 사 유배되기도 하는 등 관직에 몇 차례 물러났다. 그러나 중국 사신이 조선을 방문할 때는 그만큼 유능한 외교관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기에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불렀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대표적인 전시 작품으로 허균이 엮은 시선집인 ‘국조시산’, 허봉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과정을 쓴 기행문인 ‘하곡조천기’, 허난설헌의 시문집 ‘난설헌집’, 영조 때의 문인 신광수와 허초희의 시를 모아서 한 시집으로 펴낸 ‘석란유분’ 등이 전시됐다. 또한 허균이 이상사회를 향한 의지를 담아 최초의 한글소설이자 사회혁신을 꿈꾼 사회소설인 ‘홍길동전’이 만화와 동화책 등으로 다양하게 시중에 나왔던 책들이 전시됐다.

▲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내부 다양한 홍길동전이 전시된 모습. 홍길동전은 허균이 이상사회 실현을 꿈꾼 내용을 담은 최초 한글소설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전시장에서는 ‘문장가’ ‘자유인’ ‘개혁가’의 3색 허균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특히 눈길이 가장 모아지는 것이 ‘개혁가’로서의 허균이다. 허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유럽의 지도와 천주교의 ‘게십이장’을 얻었다는 기록이 ‘어우야담’이나 ‘성호사설’에 전해진다며 그가 조선의 사회개혁 의지를 구체화시켰다는 설명이 나온다.

비록 허균은 역성혁명을 이유로 참수당해 그가 꿈꾼 이상사회의 실현은 좌절됐지만, 전시관에서 엿본 그의 사상과 삶은 많은 여운을 남기게 한다. 그가 시대를 앞서 추구한 사상이 당시 시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삶도 느끼게 한다.

▲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내에 있는 두 사람의 영정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허균의 누이 허초희 역시 그렇다. 당대 최고의 여류 문인이었으나 꽃다운 나이에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나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고 27세에 요절했다. 중국 ‘양조평양록’에는 허균의 누이가 일곱 살에 능히 시를 지었으므로 온 나라에 여신동이라 불렸다고 기록됐고, 허균도 극찬한 허봉 역시 “난설헌의 시는 배워서는 그렇게 될 수 없다”라고 할 만큼 재주가 천부적이라는 것을 알게끔 한다. 전시장 한 켠에는 시대를 앞서 세상과 화합하기 못했던 두 예술가라고 허난설헌과 허균을 소개하는 문구와 설명이 있다.

허난설헌은 남존여비가 강한 시대에서 여성으로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분노를 안고 살아간 천재 여류시인이었다. 그가 평생 원망하면서 죽을 때까지 가슴에 한을 품고 간 것 세 가지는 ‘조선에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김성립(남편)에게 시집간 것’이라고 한다. 허난설헌의 이 같은 한 맺힌 생애는 전시를 보는 내내 가슴 저리게 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공원 내에 있는 허난설헌 동상에는 그가 어린 딸과 아들을 두 해에 걸쳐 연이어 잃은 엄마로서의 슬픈 감정까지 잘 표현해 낸 시가 적혀 있다. 그가 얼마나 감정요소를 깊이 있게 문학작품으로 잘 표현해내는지를 생각하니 감탄과 안타까움이 섞인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며, 또한 비극의 가족사를 생각하면 숙연케도 한다.

▲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내 허난설헌 동상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 허난설헌 동상 앞에 허난설헌 시가 적힌 비석. 허난설헌이 두 해에 걸쳐 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은 슬픔을 노래한 시가 애절함이 가득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허난설헌은 상당한 작품을 많이 남겼으나 임종 때 유언대로 모두 소각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동생 허균이 다행히 일부 챙겨 보관한 작품을 명나라 사신에게 보여주게 되면서 허난설헌이 별세 후 18년 뒤에 최초로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난설헌집이다.

이들의 생가터는 토담으로 둘러싸인 한가운데에 기와집 몇 채로 이뤄졌는데 사랑채에는 허균 영정이 봉안돼 있다. 뒤쪽 안채에는 허난설헌의 영정도 보인다. 고풍의 기와집과 넓은 마당이 잠시 당시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착각도 들게 한다.

▲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전경 (제공: 강릉시) ⓒ천지일보(뉴스천지)
▲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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