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전 청와대 홍보수석

6·2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각 정당들이 공천을 마무리해가고 있다. 한나라당이 오세훈 현 서울시장을 차기 서울시장 후보로 재공천하고 민주당이 한명숙 전 총리를 역시 서울시장 후보로 확정한 것을 비롯해 주요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의 공천도 사실상 마무리됐다. 현재까지 드러난 이번 공천 내용을 들여다보며 나는 묘한 ‘데자뷰(deja vu, 旣視感)현상을 느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곰곰이 따져봤더니 절묘하게도 이번 지방선거 공천의 큰 윤곽이 지난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공천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었다. 이 현상은 여야가 공히 동일했다. 지난 총선 공천의 특징은 여당인 한나라당은 대폭 물갈이를 한 데 비해 야당인 민주당은 물갈이 시늉만 하다 말았다는 점이다.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는 대검찰청 중수부장 출신인 안강민 변호사를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영입해 연부역강한 중진의원들을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그 결과 지역구 현역의원 109명 중 42명(38.5%)이 교체됐고, 텃밭으로 불리는 영남과 서울 강남권에서는 현역의원이 각각 43.5%, 50%나 공천장을 받지 못했다. 이는 2004년 17대 총선 때 35.4%, 2000년 16대 총선 당시 31.0%와 비교해 볼 때 한나라당 역사상 최대 물갈이가 이뤄진 것이었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 씨가 공천에서 원천 배제됐고, 박종웅, 김덕룡, 김무성, 서청원 등 구 상도동계 정치인들도 모두 공천 신청 자체가 아예 배제되거나 탈락됐다. 또한 박희태, 정형근, 맹형규, 박계동 등 거물들도 물을 먹었다. 거의 혁명이나 다름없는 개혁공천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친이명박계가 공천을 주도하면서 친박근혜계를 견제한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유권자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준 게 사실이었다.

여당의 승부수에 놀란 민주당도 대한변협회장 출신 박재승 변호사를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영입해 공천작업에 나섰다. 민주당도 처음에는 비리연루자 원천배제, 호남 30% 이상 물갈이 등 추상같은 원칙을 내세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 의원을 공천에서 원천배제하고 박지원, 한화갑, 정균환, 안희정 등 거물들을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이어 호남에서 이광철, 한병도, 김태홍, 지병문 의원 등을 1차 공천에서 탈락시킴으로써 대폭적인 물갈이에 시동을 거는 듯했다. 하지만 공천 태풍은 여기까지만 불다 그냥 잦아들었다. 그 이후엔 여론조사 경선이라는 신진인사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경선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전남지역 1곳을 제외하곤 모두 현역의원이 재공천되는 형국으로 끝났다. 과거의 ‘도로 민주당’으로 돌아간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이번 지방선거도 대충 사정이 비슷하다. 한나라당은 이번 수도권 기초단체장 후보 공천에서 현역 단체장의 60%가량을 물갈이했다. 영남에서도 50% 이상 물갈이를 했다. 한나라당은 특히 서울의 경우 4명의 여성후보를 전략공천하는 등 한나라당 소속 단체장 19명 중 61%를 갈아치웠다. 이에 비해 민주당은 호남 지역에서 기존 단체장을 75%가량 재공천했다. 수도권은 원래부터가 민주당 소속 현역기초단체장이 4명밖에 되지 않아서 이들 중 3명을 다시 공천한 것은 이해한다손치더라도 호남지역은 그냥 무풍지대로 방치한 것은 지도부의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호남에선 남원시만 현역 민주당 시장이 경선에서 낙마했다. 호남 물갈이가 제대로 안 된 이유는 당이 현역 단체장에게 졀대적으로 유리한 국민참여경선이라는 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초기에 시민공천배심원제라는 회심의 카드를 들고 나와 대폭 물갈이를 장담했으나 현역 국회의원들의 반발이 거세자 슬그머니 이를 거둬들였다. 결과적으로는 전국적으로 겨우 13곳에서만 실시됐고 그나마 호남지역에선 광주시장과 여수, 임실 등 3곳에서만 실시됐다.

이번 역시 태산명동 서일필이었다. 업무의 연속성과 경륜의 측면에서 현역 단체장이 일을 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 여론조사에서 현역 물갈이 여론이 과반수가 넘는데도 새 인물을 수혈해 면모를 일신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은 후안무치다. 특히나 민주당의 경우 공천이 곧 당선이나 다름없는 호남지역에서의 현실안주적 공천결과가 수도권에서 역풍으로 작용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민주당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그토록 혼쭐이 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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