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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년간 가뭄 100건 발생
천재지변, 천벌이라 생각
종묘·사직서 기우제 올려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하늘이시여, 비를 내려 주옵소서!”

극심한 가뭄이 지속됐다. 왕은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한 후 사직단에 올랐다. 기우제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왕은 하루빨리 비가 내려 흉흉해진 민심이 안정되길 바랐다.

오늘날에야 기우제로 비를 내리게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겠지만, 그땐 그랬다. 하늘이 노해 비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사 속 가뭄 빈번

가뭄은 비가 보통 때에 비해 오랫동안 오지 않거나 적게 오는 기간이 지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기후학적으로는 연강 수량이 기후 값의 75% 이하이면 가뭄, 50% 이하이면 심한 가뭄으로 분류된다. 최근에는 열대야 일수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6월부터 가뭄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조선의 역사 속에서도 가뭄이 빈번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90년 동안 총 100건의 가뭄 기록이있는데, 가뭄에 의 한 피해는 대부분 기근이었다. 평균적으로 5년에 한 번꼴로 가뭄이 발생했다. 2년 연속 가뭄은 15회, 3년 연속 가뭄 4회, 4년 연속 가뭄 1회, 6년 연속 가뭄 2회 등 해를 거듭해 가뭄이 발생했던 경우가 많았다. 6년 연속 가뭄이 발생한 시기는 효종 8년(1657)~현종 3년(1662), 현종 7년(1666)~현종 12년(1671)이었다.

◆다양한 가뭄 피해

가뭄으로 다양한 피해도 발생했다. 세종 5년(1423) 4월 16일 기록에는 경기감사가 가뭄과 관련해 보고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제 경상도 녹전(祿轉: 녹봉에 충당된 민전의 조세)을 조운(漕運: 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하는 때를 당하여, 가뭄으로 강물이 얕아져서 배들이 여울을 만나게 되면 통행하지 못하니, 청컨대 여흥 음죽 이천 천령 지평 양근 광주 등지의 수령(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으로 하여금 각기 물가에 사는 백성을 동원해 여울을 파서 배가 통행하도록 하소서.”

즉, 가뭄으로 남한강 물이 얕아져서 경상도의 세금을 남한강의 조운을 통해 서울로 옮기기가 어려워지자, 하상 준설공사를 건의한 것이다.

가뭄 심해 하천이 단절되자 여울이 얕아져서 건너다닐 수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선조 36년(1603) 6월 8일에 평안도의 청천강의 수심이 얕아져서 사람과 말이 강물 한복판으로 건널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노인들은 “이전에는 없던 재변”이라고 했다. 인조 19(1641) 4월 26일에는 경상도의 가뭄으로 낙동강 물줄기가 끊겼다.

◆조선시대 가뭄 대책

조선시대에는 천재지변이 닥치면 하늘이 내린 징벌이라고 생각했다. 유교적 관념으로 보면 왕은 하늘을 대신해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늘이 이상 기후를 보이는 것은 마치 왕이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그럴 때면 왕은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등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또한 가뭄 극복을 위해 수리사업을 일으켰고 평상시에도 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방의 수령들을 감찰했다. 전국적으로 농서(農書)와 농정(農政)에 대한 신기술과 정책을 수렴하고자 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농사에 이용하고 있는 수차(水車)를 도입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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