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미증유의 비극이었던 임진전쟁 여러 기록들을 보면 참담하기 짝이 없다. 죄 없는 백성들이 더 큰 수난과 고통을 당했다. 처연한 참상 앞에선 분노마저 치밀어 오른다.

전쟁의 칼날을 피해 그나마 생존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부모는 자식들을 버리거나 팔았다. 고아들은 떠돌아다니며 걸식을 했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 사람들의 시체가 성벽을 이뤘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다. 죽은 어미젖을 빠는 어린아이를 어느 병사가 데려다 길렀다. 남도 백성들은 봉도(鋒刀)에 죽고 기근(饑饉)에 죽었으며 나머지도 죽은 이들의 고아들로 먹을 것도 없이 아직 가쁜 숨도 가누지 못했다… -

재상 유성룡의 셋째 아들 유진 도령은 당시 11살이었다. 그런데 효심으로 부친을 찾겠다고 집을 나와 한때 꽃제비 신세가 됐다. 유진은 친척을 따라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풍양·양주·영평·포천 등지와 강원도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선조가 몽진한 평양 근교까지 걸어가 아버지를 만나려 했으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

유랑기간은 고난의 11개월이었다. 그는 50세 되던 해 기억을 더듬어 ‘임진록’이란 역사 일기를 완성했다. 후세에 전쟁을 경계하기 위해 부자가 함께 일기를 쓴 셈이다. 소년이 직접 체험한 임진전쟁의 참상은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임진전쟁 당시 강원도 선비 고종원(高宗遠)은 의병장으로 기록된다. 그는 ‘기천록(祈天錄)’을 남겼는데 울진 백성들이 겪은 처참한 피란 생활을 적은 것이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울진 백성들 500여명이 영월 굴속으로 피난했다. 그런데 왜군이 몰려와 밖으로 나오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무서워 나가지 않았다. 잔인한 왜병들은 동굴 입구를 돌로 막았으며 백성 500명이 갇혀 굶어죽었던 것이다. 전쟁은 이처럼 죄 없는 백성들에게 참혹한 형벌이었다.

실학자 이수광(李晬光)은 저서 지봉유설에 더 끔찍한 기록을 남긴다.

-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서 여자와 어린이들이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못할 형편이었다. 굶어 죽은 시체가 쌓이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 시체의 살을 떼어 먹었으며, 시체의 골까지 뻐개 그 진물을 빨아 마신 뒤 바로 그 자리에서 엎어져 죽었다. 쌓인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으나 거두어 장사지내주는 자가 없었으며 아비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았다… -

임진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약 50만명으로 기록된다. 인구의 3분지 1이 참화를 입었다는 통계도 있다. 조선은 전쟁의 참화를 입은 지 얼마 안 돼 또 병자, 정묘호란을 당해 설상가상의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 민족의 눈에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6.25는 임진전쟁과 양 호란에 이은 현대사 최대 비극이었다. 한국동란사 자료를 보면 남한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명을 포함한 약 200만명으로 나타난다. 공산진영 인명피해는 100만명의 민간인을 포함 약 25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휴전이 된 지 64년이 지난 지금 남, 북은 총 머리를 코앞에 들이대고 있으며 혈육들과 헤어진 이산가족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있다. 세계에서 우리처럼 불행한 민족이 어디 있을까.

지금 북한은 민족의 비극을 다시 불러일으킬 위험한 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장사포로 한반도 1000군데를 타격할 준비가 돼있다고 호언한다. 다시 전쟁이 난다면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많으며 한민족은 역사의 종언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몇 해 전 터키 해변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시리아 어린이 아일란 쿠르디의 죽음은 이 시대 전쟁의 비극을 말해주는 눈물겨운 사건이었다.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의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겐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 이만희 대표의 ‘전쟁 종식 운동’이 가장 긴요한 임무임을 이번 6.25 발발 67주를 맞아 다시 한번 기억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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