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청도의 동해로에는 11개의 조각공원이 있다. 그 가운데 4호공원인 오사광장이 가장 중요하다. 광장의 북쪽에는 청도시 청사가 있고, 남쪽은 부산만(浮山灣)과 접한다. 남북으로 700m인 이 광장의 면적은 10ha정도이다. 이 광장은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기는 청도시의 상징이다. 중국의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가장 부러운 것이 광장이다. 국토가 넓은 탓도 있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중시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반기는 위정자는 거리낌이 없지만, 그것을 두려워하는 위정자는 자신감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여의도광장을 공원으로 만들어버린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광활하고 깨끗한 바다를 마주한 청도에서 현대식 광장을 바라보면, 급격히 발전하는 청도의 자신감을 엿본다.

오사광장은 1919년에 폭발한 반제국주의운동인 ‘오사운동’을 기념하는 곳이다. 오사운동은 일제에 의해 강탈당한 주권을 되찾기 위해 발발한 한국의 삼일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삼일운동 2달 후 중국인들은 청도 주권회복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그것이 오사운동이다. 최근 사드배치 문제로 갈등을 빚은 중국정부가 한국으로 오는 관광객을 막은 것은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공격하는 촛불축제 때문이라는 분석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따지기를 좋아하는 필자는 주권회복 투쟁을 왜 운동이라 했을까 궁금하다. 총칼을 들고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능동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는 평가를 하기 위해서일까? 어떤 가치매김을 하더라도 왠지 운동이란 약자의 피동적인 외침이라는 이미지를 떨칠 수 없다. 그것은 민족의 투쟁이었고, 침략자에 대한 전쟁이었음이 분명하다.

1897년 독일이 청도를 점령한 후, 중국인들은 청도의 주권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14년 일본은 독일을 대신해 청도를 점령한 다음, 청도를 장기점유하기 위한 외교적 책략을 계속했지만, 중국인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된 이듬해 1월 파리평화회담이 개최됐다. 중국은 전승국의 자격으로 이 회의에서 청도의 주권회복을 요청했지만,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의 반대로 무산됐다. 소식이 전해지자 그 해 5월 4일 북경의 학생들이 이 강화조약을 거절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사력을 다해 청도의 주권을 지키자!” “우리의 산동을 되찾자!” “청도는 우리 땅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의 애국적인 행동은 전국의 국민들에게 지지를 얻었고, 주권회복을 위한 외침이 높아지자, 중국정부도 파리강화조약을 거절하고, 일본의 영구적인 청도점유를 위한 음모를 분쇄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인들의 용감한 투쟁으로 1922년 12월 10일 청도의 주권이 회복됐다. 청도는 오사운동의 도화선이 되면서 중국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오사광장이 완성된 후, 동부의 신시가지는 문화거리로 변했다. 오사운동 80주년을 맞이해 중앙TV는 오사광장에 관한 방송을 제작해 전국에 송신했다. ‘5월의 바람’도 이 방송의 타이틀이 되어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필자가 이 광장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청도에 머무는 동안 우리 동포가 운영하는 민박집 해도에서 아침산책을 나갔다가 만난 중국인 때문이다. 중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필자가 청도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다가 퇴임한 장백인(張伯仁)이라는 분과 이런저런 필담을 나누다가, 오사광장을 조성한 책임자가 자기 아들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인자하지만 중국인답게 궁금한 것이 많았던 장 선생은 필자와 해도의 주인을 아침부터 초대해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기의 작품을 구경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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