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지난해 3월 서울에 살던 50대 아들이 70대 어머니를 살해했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병수발해야 하는 고통에 직면한 아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노모의 시신은 현관 계단 밑에 암매장했다. 사건 직후 이사한 뒤 고시원 등을 전전하다가 1년여 뒤인 지난달 말 장례를 치르고 싶다면서 경찰에 자수했다. 대구에 사는 ‘60대 아들’은 치매 걸린 노모를 10년 동안 보살피던 중 어느 날 격분한 나머지 노모를 살해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지난 3월 서울에 살던 30대 젊은이가 50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쓰러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간병에 몰두했다. 1년에 걸쳐 간병하는 사이에 쌀도 떨어질 정도로 생활고에 찌들고 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아버지를 목 졸라 죽이는 끔찍한 행동을 했다. 스스로도 목숨을 끊으려다 실패하고 경찰에 자수했다.

부산에 살던 ‘30대 아버지’는 5개월 된 아들을 살해했다. 8년 형을 선고 받았다. 아들은 희귀성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고 평생 약물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부부싸움을 하던 아버지는 부부의 불화가 아들 때문이라고 생각한 끝에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 부부는 아들 치료와 양육 문제로 자주 다투었다. 아버지는 우울증을 앓은 지 오래 되기도 했다 한다.  

이 ‘네 죽음’에 대해 언론매체는 모두 대서특필했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언론은 또 다른 극단적인 사건이 터지면 누구누구는 어찌어찌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보도한다. 마치 스케치 하듯이. 물론 글쓴이의 반응은 다양하다.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는 사람도 있고 세태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 형량을 높일 것을 주문하는 사람도 있다. 질병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모기소리만 해서 사람들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이 ‘네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다.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범위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아주 부유한 집안이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감당불가’고 절망 그 자체다. 중산층도 가족 구성원이 중병에 걸리면 가계가 쓰러진다. 병원비도 벅찬데 간병비까지 감당해야 하니까 쓰러지지 않을 방법이 없다. 빈곤층은 말해서 무엇 하랴. 치매, 뇌졸중, 희귀난치성질환 같은 중병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 한시가 급한 문제다. 

경제생활은 물론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각자도생으로 살아오는 이 나라 국민들이다. 건강과 병원비 문제까지 각자도생으로 해결하라고 하면 그동안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삶이 너무나 억울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중증질환만큼은 국가가 책임지는 나라로 진화해야 한다. 인간다운 세상은 못 만들어도 중병에 대한 치료만큼은 국가가 책임지는 나라가 돼야 없는 사람도 숨통이 트이지 않겠는가? 아무리 큰 병이 걸려도 연간 100만원만 내면 되는 ‘병원비 100만원 상한제’ 도입이 절실하다.  

나는 건강, 교육, 주거는 공공성이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의료가 인술이 되고 교육이 전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모두가 편안한 주거를 누리는 사회가 되려면 공공성이 확보돼야 한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이 돼야 하고 주거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돼야 한다. 

병원비로 가계가 쓰러지는 집이 많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는 인생인데 꽃을 피어보기는커녕 ‘쓰러지는 인생’은 너무나 허무하고 슬프지 아니한가. 쓰러지는 누군가를 보고도 방관하거나 침묵하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는 이미 사회가 아니다. 사회는 함께 슬픔과 고통을 나누고 동고동락하는 게 본질 아닌가! 상호의존하고 서로 존중하는 게 사회다. 누구나 인간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고 사회는 구성원에게 행복을 보장할 책임이 있다.    

누군들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군들 부모 위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을까. 누군들 자식 잘 돌보고 싶지 않은 사람 있을까. 하루하루 끼니 잇기도 힘든데 하루하루 몸뚱어리로 살아가는 삶인데 하루하루 쫓기듯 살아가는데 하루하루 일자리 구하느라 조바심 내는 인생인데 가족 가운데 큰 병이 나거나 큰 병을 갖고 자식이 태어나면 얼마나 당혹스러울 것인가. 힘든 삶을 간신히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일생을 간병만 하고 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누구나 사회가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왜 태어났나’ 하고 자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든 네 사건은 중증질환에 대한 치료와 간병이 각자도생에 맡겨질 때 얼마나 참혹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범죄는 용납될 수 없고 어떤 범죄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결과만 보고 원인이나 과정을 보지 못한다면 사물을 똑바로 볼 수 없다.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면 똑같은 불행은 반복된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현실은 사회가 기능정지 수준을 넘어 붕괴되고 있는 신호다. 각론이나 대중요법이 아니라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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