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지금 미국 사회가 웜비어란 20대 대학생이 북한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부글부글 끓고 있다. 제 발로 걸어 집을 떠났던 그가 거의 식물인간이 돼 돌아왔기 때문이다. 북한에 18개월간 억류됐다가 혼수상태로 귀국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를 돌보고 있는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대 병원 의료진은 지난 15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웜비어가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라고 밝혔다. 의료진은 “웜비어가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이긴 하지만 말을 못 하고, 듣더라도 반응이 없으며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못한다”며 “광범위한 뇌 조직 손상으로 인한 ‘깨어 있지만 반응하지 않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의료진은 뇌 손상 원인은 아직 모른다면서 “다만 이런 뇌 손상은 일정한 혈류 공급이 중단된 심폐정지 상태에서 뇌 조직이 죽을 때 흔히 관찰된다”고 덧붙였다. 의료진은 웜비어가 식중독인 ‘보툴리누스 중독증’에 걸려 마비됐다는 북한 주장에 대해선 “관련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부인했다. 가혹 행위를 뒷받침할 만한 신체적 외상이나 골절의 흔적은 없었다고 했다. 수면제를 복용한 후과라고도 하지만 교화소에 구금되어 있는 웜비어가 약이 절대 부족한 북한에서 어떻게 수면제를 다량으로 구입할 수 있었단 말인가. 북한의 식중독 주장에 대한 의료진의 반박이 나오면서 웜비어가 북한에서 신체적 폭력을 당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확산하고 있다.

인터넷 매체인 복스는 “북한이 웜비어를 고문했는가”라는 기사에서 과거 북한에 억류됐다 풀려난 미국인 로버트 박이 고문을 당한 전례를 소개했다. 웜비어의 아버지 프레드 웜비어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아들이 김정은 정권에 의해 테러당하고 학대당했다. 북한이 우리 아들을 대한 방식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비난했다. 또 “북한은 억류된 미국인들을 모두 풀어 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아들이 북한에서 재판 당시 입었던 재킷을 입고 회견장에 나왔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화해 ‘슬픔(sorrow)’을 표시하고 웜비어의 송환을 위한 미 국무부의 노력을 설명했다”고 전했다.

웜비어는 버지니아대 재학 중이던 지난해 1월 평양에 관광갔다가 정치 선전물을 훔쳤다는 이유로 체포돼 체제전복 혐의로 15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웜비어와 한 방에서 머문 영국인 대니 그래튼은 15일 워싱턴포스트에 “내가 겪은 웜비어는 이런 일(호텔에서 선전물 절도)을 할 사람이 아니다. 매우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고 말했다. 정치선전물이라면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정치선전 구호물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단순하게 절도죄로 평가해야 하지만 북한 체제는 법 위에 ‘10대 원칙’이란 것이 존재한다. 북한의 최대 인권탄압 기구인 국가보위성은 이 10대 원칙을 잣대로 북한 주민들을 처벌한다. 즉 신격화의 원칙에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관련된 시설물을 훼손할 경우 즉결처분의 권한을 부여하며 이 원칙에 따라 웜비어를 체포 구금한 것으로 보인다. 보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웜비어는 김정은 정권의 ‘인질정치’의 희생양이다.

북한의 미국을 겨냥한 인질정치는 오래 전인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 2009년 8월에는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성조기가 가려진 특별기를 타고 평양을 들어갔다. 그가 탄 비행기는 한반도 상공을 거쳐 북한 영공으로 비행한 것으로 보도됐다. 이러한 비행 코스만 보더라도 그의 평양행에는 북·미 간, 한·미 간에 미리 상당한 물밑 접촉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단순히 미국 시민권을 가진 여기자 2명을 구출하기 위해서 이렇게 파격적인 여행을 했을 턱이 없다.

아무리 미 백악관이 그 여행을 ‘인도적 또는 개인적 목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공식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저녁식사를 겸해 3시간 넘게 대화했다는 것은 수많은 추측을 낳을 만하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평양을 가기 훨씬 이전에 그의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북한 당국에 대해 여기자들을 사면(amnesty)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간청했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점을 밝힌 바가 있다. amnesty는 ‘망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amnesia에서 유래하는데 국가가 유죄 확정자에게 그 과거의 행위를 소멸시켜 유죄판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효력을 부여하는 형사법상의 주권행위(主權行爲)이다. 클린턴 국무장관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한 데다 여기자들의 행위가 범죄에 해당된다는 것도 인정한 것이다. 북한의 인질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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