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유관순 스승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 사육신 하위지 후손”
[단독] “유관순 스승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 사육신 하위지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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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란사 남편 하상기씨 (제공: 김란사 친정조카손자 김용택씨, 김란사 추모사업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상동교회 민족교회 연구소 김종설 사무국장
“사육신 하위지, 삼족이 멸했으나 자손 하나 겨우 살아남은 듯

살아남기 위해 호적 단계로 고쳐 사용, 하상기도 처음엔 몰라”
오늘날의 대법원이라 할 수 있는 ‘예식원’서 후손으로 인정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시대에는 반란이 실패로 끝나면 삼족(三族)이 멸족 당했습니다. 그 중 누군가 겨우 살아남았을 경우 죽지 않기 위해 호적을 바꿔 살았죠. ‘사육신(死六臣)’인 하위지 후손 하상기의 집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동교회 민족교회 연구소 김종설 사무국장은 하상기 집안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하상기는 유관순 스승인 김란사의 남편이다. 김 사무국장은 “두 부부는 (일제강점기에) 강하고 몸 바쳐싸운 장렬한 충신”이라고 말했다. 특히 하상기가 하위지의 후손이라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사육신은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죽은 6명의 신하다.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반란이 실패하게 되면 주동자는 살려두지 않았다. 남자는 죽임을 당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던 시대였다.

김 사무국장은 “사육신 하위지도 삼족이 멸족 당했다. 그런데 직계자손은 아니겠지만, 집안의 자손 하나가 다른 곳에 있었나보다. 훗날 예식원(오늘날의 대법원)에서 하상기가 하위지의 후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고 강조했다.

◆사육신 하위지 본향 두고 논란

그는 조선왕조실록 안의 내용을 근거로 들었다. 실제로 고종 42년(1905년) 4월 22일 종2품 이면주가 하위지의 본향과 호를 무함(誣陷: 없는 사실을 꾸밈)한 하상기를 벌하도록 하는 내용의 상소를 임금에게 올린다.

“요즘 하상기라는 사람이 제멋대로 예식원에 거짓을 꾸며 고소를 하여 충렬공 하위지를 단계인(丹溪人)이라고 하면서 열성(列聖: 대대의 임금)이 이루어 놓은 법을 무너뜨리고 있으니 법으로 보아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생략) 그가 본관과 호를 무함한 것과 같은 것은 장릉의 묘지문과 ‘홍재전서’에 모두 본관은 진주이고 호는 단계라고 돼 있습니다. (생략) 하상기를 엄히 주벌하여 나라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소서.”

즉 이면주는 하상기가 “사육신 하위지가 단계하씨”라며 없는 일을 꾸몄다며, 그를 벌줘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 거다. 이에 대해 4월 26일 종2품 박해철(朴海哲)이 이면주의 상소가 잘못됐다고 상소를 올린다.

“그가 명(明) 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충정공과 충문공, 성삼문 등 27명이 각각 관향을 썼는데, 충렬공은 ‘단계’라고 하였다는 것이 중국의 ‘요해편’과 우리나라의 ‘황화집’에 실려 있어 고찰하여 알 수 있습니다. 저 이면주의 무리가 자세히 보지도 않고 폐하를 미혹시켰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속히 처분을 내림으로써 망령된 말을 한 이면주 무리들의 죄를 다스려 주소서.”

이후 6월 8일 이면주가 다시 상소문을 올려 하위지의 본향이 무함당하였다고 했다.

▲ 유관순 열사 스승인 김란사씨 (제공: 김란사 친정조카손자 김용택씨, 김란사 추모사업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단계와 진주, 같은 것” 예식원서 정리

상황이 이러하자 장례원 경 이도재가 다음 해인 고종 43년 10월 24일 임금에게 아뢴다.

“두 신하의 소본을 가져다 보니, 이면주는 진주(晋州)가 옳다고 하고 박해철은 단계(丹溪)가 옳다고 하면서 각각 증거를 들고 있는데 그 말이 분분했습니다. 두 사람이 하씨의 문제를 놓고 다투는 것은 바로 대를 잇는 문제와 관향에 대한 문제일 뿐입니다.”

즉 하상기가 하위지가 단계하씨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이면주는 ‘진주’가 맞고, 박해철은 ‘단계’가 맞다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이도재는 “하구용(하상기 아들)의 집에서 새로 만든 사판(祠板: 신주)과 정려문에 대해서는 한성부에서 즉시 매안(埋安: 신주를 무덤 앞에 묻음)하고 부수도록 하며, 안동군에 있는 사판은 예전대로 봉안(奉安: 신주를 받들어 모심)하도록 하소서”라고 아뢴다.

이에 임금은 “이번에 아뢴 바는 정확하고도 명석하다. 아뢴 대로 시행하여 영원히 바꿀 수 없는 법으로 삼겠다. 이전에 내린 판부(判付: 판결)는 취소하라”고 명을 내린다.

이와 관련, 김 사무국장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내용을 모르나, 삼족이 멸족당하는 시대적 상황을 알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언급했다.

김 사무국장은 “조선의 이방원이 혁명을 일으켰을 때, 고려 왕족 후손들을 죽였다. 이때도 후손들이 살기 위해서 왕(王)자에 점 하나를 찍어서 구슬옥(玉)을 만들거나, 들입(入)을 합쳐서 온전할전(全)으로 바꿔 신분을 속여 살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삿갓도 자신이 역적의 집안이고 신분을 속여 살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전했다.

이어 “하상기 집안도 마찬가지다. 하상기는 조상들이 단계하씨라고 이야기 해 그런 줄만 알고 살았다”며 “(조상이) 살기 위해 호적을 단계라고 고쳐 사용한 걸 몰랐던 거다. 당연히 사육신인 하위지도 단계하씨일 거라 생각한 거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결과적으로 단계, 진주, 진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예식원에서 더 이상 단계니, 진주니 운운하지 말라고 교통정리 해준 것”이라며 “하상기가 하위지 후손임을 최종적으로 결론 내렸다”고 덧붙였다.

◆하위지 후손 하상기와 아내 김란사

한편 하위지 후손 하상기는 1899년(광무 3) 경무관으로 있다가 처음으로 인천감리(仁川監理) 겸 인천부윤(仁川府尹)에 임용되고 주임관 6등에 서임됐다. 1902년(광무 6) 경무청 경무국장에 임용됐고 다시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으로 임용됐다. 이후 신분을 외교관으로 바꾼 후 친일파를 잡는 임무를 수행했다.

하상기의 부인 김란사는 1894년 청일전쟁 후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자 국가를 지키기 위해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1895년 게이오대학에 자비로 유학하고 1897년에는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1900년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웨슬리언대학 문과에 입학해 6년 만에 우리나라 여성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910년 이화학당의 총교사(오늘날의 교감)로 재직했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경에 도착한 다. 이후 동포가 주최한 저녁식사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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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용 2017-06-16 22:35:46
역시 하위지의 증손답게 부인마저도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유관순의 마음을 동요하게 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