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파 방정환의 초상화. ⓒ천지일보(뉴스천지)

어린이 잡지 최초 발간… 표제 ‘어린이’ 낱말 창안해 보편화

[뉴스천지=최유라 기자] 대한민국 어린이라면 누구나 기다리는 날, 바로 5월 5일 어린이날이다. 비록 어른이라도 한때 어린 시절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어린이날. 특히 이날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거나 사랑을 표현하면서 아이들의 행복을 기원한다. 법정 공휴일로 정해진 어린이날의 창시자이자 천도교인이었던 소파(小波) 방정환에 대해 살펴본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 방정환

소파 방정환(1899~1931)은 온양 방씨 가문의 4대째 장손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2살 위인 누나가 있다.

당시 그의 집안은 서울 야주개 시장거리에서 미곡전과 어물전을 겸하며 장사를 했기 때문에 재정이 튼실했다. 유복한 집안 환경 속에 귀여움을 듬뿍 받았던 어린 방정환은 유독 영특했기에 이웃주민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만 세 살에는 앳된 발음으로 천자문을 줄줄 읽을 정도였다.

또한 개구쟁이였던 어린 방정환은 말총으로 참새 잡는 올가미를 만들기 위해 어머니 반짇고리에서 가위를 집어내 가게 앞에 선 마차의 말 꽁지에 갖다 대었다가 말 뒷다리에 실컷 채였다는 등 여러 가지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처럼 어린 시절 방정환은 남다른 행동기질로 눈에 띄는 아이였으며, 즐겁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영원히 단란할 것만 같았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천도교 입교 배경

1890년대 이후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 등의 혼란으로 국력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집안은 사업이 실패로 이어져 가세가 기울지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천도교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를 계기로 천도교인이 된 방정환은 천도교인을 사위로 두려 한 의암 손병희 선생을 만나면서 손 선생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 제3세 교조이며 3․1운동 독립선언문 33인 중 한 사람이다. 방정환은 이런 장인어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천도교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해월신사 가르침으로 어린이날 탄생

어린이날을 제정하게 된 배경은 천도교 제2세 교조인 해월신사(최시형)가 “어린아이를 때리지 말라. 어린아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라”고 한 말에서 비롯됐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창립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가 이듬해 ‘천도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1921년 1월 소파 방정환, 소춘 김기전, 현파 박래홍 선생을 중심으로 ‘천도교소년회’를 발족시킨다.

‘천도교소년회’는 소년대중의 ▲사회적 새 인격 향상 ▲동학부 의적 교양과 사회생활 훈련 ▲공고한 단결로써 전적 운동 기함이라는 강령으로 16세 이하 소년들의 ‘지율·덕율·체율’을 목적으로 출발했다.

그리하여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고 도와갑시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본격적인 어린이운동을 전개했다.

▲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기념비. 이곳에서 1923년 최초로 어린이 인권 선언을 했다. 뒤로는 천도교 중앙 대교당이 보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도교소년회 ‘어린이의 날’ 선포

‘천도교소년회’는 창립 1주년인 1922년 5월 1일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날로 제정할 것을 선창했으며, 이듬해 어린이날 행사를 보다 사회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1923년 5월 1일 창립하기로 한 색동회와 협의해 ‘조선소년운동회’가 주최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합의하고 기념식을 거행했다.

◆5월 5일 ‘어린이날’로 확정

이후 어린이날은 천도교 중심의 민족주의 소년운동과 오월회 중심의 무산소년운동으로 통합되고 분열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후 1927년 10월 16일 다시 ‘조선소년연합회’로 통합돼 어린이날을 5월 첫째 공휴일로 바꿨다.

이듬해 1928년부터 어린이날 주최 기관이 ‘조선소년운동총동맹’으로 다시 바뀌어 어린이날 행사를 지속하다가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일제의 탄압이 심화되더니 1937년부터는 아예 금지되고 소년단체도 강제 해산을 당했다.

이후 8․15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 5일이 어린이날로 제정돼 오늘에 이르렀다.

▲ 대한민국 최초 어린이잡지 <어린이>는 당시 시가 100원의 가격으로 전국적으로 배포한 월간지였다. 당시에도 입학시험준비특집이 있을 정도로 어린이들의 학업에 길잡이 역할을 했다. 또한 퀴즈, 과학상식과 같은 다양하고 알찬 내용으로 어린이들의 호기심과 지적수준을 향상시켰다. 사진 속 어린이잡지는 그간 발간된 잡지를 하나로 엮어 만든 복사본 중 일부분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대한민국 최초 어린이잡지 <어린이>

잡지 <어린이>는 1923년 3월 20일에 창간됐다. 천도교의 청년 지도자들은 어린이의 정서 함양과 아동인권 신장 및 소년운동을 위해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명실상부한 근대적 아동잡지를 창간한 것이다.

<어린이>의 위상은 우리나라 아동문화운동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그 업적 또한 절대적이었다.

◆‘어린이’ 낱말 창안, 보편화

방정환은 <어린이> 창간호부터 33세에 숨을 거두기까지 직접 편집에 관여했다.

특히 어린이의 인격을 무시한 채 불렀던 애녀석·어린애·아해놈 등의 표현이 만연하던 시절, 잡지 표제를 ‘어린이’라고 정함으로써 ‘늙은이’ ‘젊은이’와 같은 평등호칭으로 일반화하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사실 ‘어린이’는 이미 방정환이 <개벽> 제3호(1920. 8월호)에 처음으로 사용해왔던 단어다.

◆아동 눈길 이끌며 교육적 기능 감당

<어린이>는 3․1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를 배경으로 만들어졌으며, 방정환이 3․1운동 당시 지하 독립신문을 제작했던 사실 등이 <어린이>지의 성격을 대변하는 요소가 됐다.

또한 <어린이독본> <조선자랑호>를 비롯한 위인전기, 우리나라 역사, 지리 등을 꾸준히 게재해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해왔다.

나아가 문학·과학·역사·수학·지리·사회 등 폭넓은 아동교육의 기능을 수행해 학교에서 교과서 대용으로 많이 사용했으며, 창작동화도 기재했다.

특히 <어린이>에 기재된 창작동요는 민족동요로 승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중단되거나 압수당하는 일이 잦아져 122호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인내천’ 사상 심겨진 아동존중사상

<어린이> 창간사를 살펴보면 천도교의 인내천사상과 해월신사(최시형)의 아동존중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한 예로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두 같은 입술로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대로 한울의 소리입니다. 비둘기와 같이 토끼와 같이 부드러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뛰어 노는 모양, 고대로가 자연의 자태이고 고대로가 한울의 그림자입니다’를 보면 노래를 한울의 소리, 어린이가 뛰노는 모습을 한울의 그림자로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방정환은 욕심으로 가득 찬 어른의 세계가 결국 망국을 자초하고 어린이의 꿈마저 빼앗아갔다고 생각했기에 이 잡지가 어린이들에게 장차 주권회복의 꿈을 심어주고 민족주의 소년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 믿었다.

◆‘소파’ 정신 남기고 떠난 방정환

소파 방정환은 1931년 7월 23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지금의 서울대학병원에서 병사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면서도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방정환은 오로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고 믿어 어린이를 위해 온갖 정성을 쏟은 애국지사였으며, 위대한 교육자인 동시에 대한민국 문학의 선구자였다.

어린이를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소파 방정환.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세대 새로운 사람입니다”라는 어록은 이미 그가 어린이들을 희망을 가진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5월 5일 어린이날은 어린이의 순수성 안에서 조국의 희망을 발견한 소파 방정환의 정신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된다.

또한 시대를 앞서 달려온 어른들이 올바른 판단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어린이들을 대하는 문화가 선행된다면 진정 어린이들의 숨겨진 저력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며 어린이날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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